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리차 Jul 13. 2021

설거지의 기쁨과 슬픔

남편의 찌질함을 잊게 해주는 것들

서울에선 식기세척기에 의지하다가

미국으로 오면서 다시 손으로 설거지를 한다.

이유는 단순한데 움직임이 너무 줄어들어서

손을 움직이는 기쁨을 만끽하려 그거라도 한다.

서울에서는 그냥 노동으로만 여겨졌던 그 일이

여기서는 설거지를 하면 풍요로워지는 느낌이 든다.

명상이라는 걸 따로 시간을 내지 않아도

설거지를 하다 보면 자연스레 머릿속이 정리된다.

뭔지 모르겠으나 한순간 리셋이 되어

일상의 잡다한 것들이 같이 사라져 깨끗해진다.

그런데 나의 이 쾌감을 방해하는 자가 있다.     


“설거지는 내가 하는 가장 섹시한 일이라고 꽤 자부한다.”

아마존 전 CEO 제프 베조스는 저녁식사 후에 반드시 설거지를 직접 한다는

이야기를 남편한테 한 적이 있다.

그걸 들은 후부터 섹시해지고 싶었는지 나서서 설거지를 한다.

우리 둘 다 어디서 주워듣는 이야기를 좋아하는데

그런 이야기는 듣는 즉시 내 인생에 적용하지 않고는

도저히 배길 수 없는 인간들이다.   

  

섹시해 지고 싶은 사람의 귀여운 설거지

그런데 이게 나를 너무 피곤하게 한다.

왜냐면 그릇에 기름을 그대로 남기는 엉터리 설거지를 해서

내가 다시 해야 하는 부작용이 있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단체 생활은커녕 회사에 다녀본 적도 없는 남편은

자기 나이에 대한 정상적인 감각을 잃어버린 게 아닐까 하고


자기 전에 이를 닦았냐? 이런 당연한 걸로

실랑이를 벌이는 우리를 보고

나는 그럴 때 내 이성의 감각도 상실한다.


나 여기 왜 온 거지?

내 인생 앞으로 망한 거 아냐?

이런 인간을 뭘 믿고 여기 온 거지?

아니다 나는 나를 믿고 왔다. 의 반복적 패턴

K1비자로 불리는 약혼자 비자를 받고 미국으로 건너온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겪었을 불안감이다.

지금도 작은 불씨가 큰 불로 번지는 경험을 수백 번 하고 있을 것이다.


국제결혼 이후 2년 이상 유지될 확률이 20%,

그러니까 대부분의 사람들 80%가 다시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간다.

우리도 그 무시무시한 통계 앞에선 쭈구리가 되는데

그 이유는 종종 그 숫자가 납득이 가기 때문이다.

결혼이 2인 3각의 운명공동체라면

국제결혼은 2인 2각,

업혀있어야만 하는 상황이다.

정말 한계에 부딪히는 날도 있는데

그럴 때마다 그걸 덮어주는 요상한 일들이 생긴다.     


설거지를 하다가 소름 돋아서 심장이 멎을 뻔했다.

너구리를 생애 처음 마주한 데다가

아기까지 대동한 너구리 가족이었다.

창문 너머로 우리는 눈이 마주쳤다.

약간 겁에 질렸지만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긴장감의 눈빛

방금 스쳐간 야생의 생명체들로 인해 순수함을 뒤집어쓴 기분이다.     


어쩌다 너구리 가족이 우리 뒷마당에 오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지난번 사슴과 오리를 만났을 때와는 전혀 다른 압도감이다.

그때는 사진도 찍고 동영상도 찍고 온갖 난리를 부렸다.

그렇게 시간을 가졌어도 그들과 통했다는 느낌은 없었다.     

아기사슴 밤비와 뜻밖의 만남

서로를 알아본 그 순간의 찰나,

눈이 마주쳤을 때 그 얼굴을 잊을 수 없다.

그릴 수도 없고 재현할 수도 없어 답답하다.

그 울림을 공유하고 싶지만 사진을 찍고 할 겨를도 없었다.


어쩌면 진짜 소중한 건 사진으로 남길 수도 없고

누군가와 공유할 수도 없는 것 같다.

오직 나만이 겪었고 그 느낌을 설명할 길은 없기에

고귀한 경험이다.


인스타에 남겨두지도 못했으니

나는 이 선명한 기억이 흐릿해지는 게 무서워

보는 사람마다 붙잡고 이 이야기를 하게 될 것만 같다.    

 

어떤 책에서 여행을 갔다가 말도 안 되게 큰 두꺼비가 방으로 들어왔고

그 이후에 생각지도 못한 큰돈을 만졌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세상에는 과학이나 논리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데

아우 모든 일이 그렇다면 숨 막혀서 어떻게 살아?

그 두꺼비는 어떤 큰일이 있기 전의 프리퀄이고

마음의 준비는 해두는 게 좋을 거야! 식의 작은 귀띔이 아닐까 싶다.    

 

나도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너구리를 봤을 때 분명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확실한 예감을 너구리 가족이 선물해 줬다.

동물과의 교감은 뭔가 새로운 언어를 체득하게 된 느낌이다.

대단한 것이 아닌 잠깐의 아이컨택일지라도

우리는 커다란 세계를 공유한 기분이다.   

  

이런 경험은 공짜이지만

돈 주고 사려고 해도 살 수가 없다는 게 포인트다.

아무런 근거도 설득력도 없는 일들이

앞으로 눈사태처럼 일어났으면 좋겠다.


이런 것들이 남편의 찌질함으로 괴로운 나를 위로해준다.

남편을 만났기에 할 수 있는 이 경험이 남편을 버릴 수 없게 나를 지켜준다.    

 

여기서, 남편을 만났기에 할 수 있는 경험이라고 믿지 않으면

이를 닦지 않고 자려는 인간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


p.s

너구리를 보고 3일 후에

우리가 기다리던 결과가 이메일로 왔다.

남편은 좋아서 바보처럼 울었고

나는 속으로 그 너구리를 떠올렸다.

작가의 이전글 내 교복은 나이키 올블랙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