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틀랜드 북클럽
“지금까지 간 공원 중에 어디가 젤 좋아?”
“그 빨간 머리 엄마 만난 공원.”
이름 대신 거기서 만난 사람으로 공원을 기억한다.
아무리 멋진 공원이라도 사람이 만들어 내는 풍경을 이길 순 없다.
Laurelhust Park
SE Cesar E Chavez Blvd And Stark Street
Portland, OR 97214
United States
아직까지 우리들의 최애 공원인 이곳은 공원계의 편집샵이다.
‘자 여기 좋아하는 부분만 셀렉해서 보기 좋게 차려놨습니다.’라는 느낌.
확 트인 잔디, 에메랄드빛의 호수, 피크닉 테이블, 높낮이가 적당한 조깅코스,
곳곳의 작은 여백들. 그리고 서로의 풍경이 되어주는 공원 피플들.
사람이 뿜어내는 분위기 하나하나가 모여 공원의 풍경을 만든다.
깨끗한 흰 도화지 같아서 어떤 게 그려질지 궁금해진다.
그런 걸 구경하기 좋은 장소가 딱 여기다.
벤치에 앉으면 작은 극장에 와 있는 것처럼
살짝 아래로 경사진 무대 같은 잔디가 있다.
나는 풀샷으로 보이는 뒷자리에 앉아 연극을 보고 있는 느낌이다.
모든 캐릭터들이 다 자기만의 별사탕을 가지고 이곳에 온다.
건빵 먹다가 목멜 때 나를 구원해주는 작은 캔디.
강아지 공원으로 불리기도 하는 여기는 강아지 천국이다.
여기서 신기한 점 하나를 발견했다.
주인이 공을 던지면 강아지는 오로지 그거 하나만 보고 달려가는 거다.
망설임 같은 게 없다.
그 어떤 강아지도 한눈을 판다거나 가만히 서있지 앉는다.
강아지들에게서 몰입하는 법을 배운다.
그냥 공만 보고 뛰는 거다.
이 순간, 눈앞의 공 말고 중요한 건 없다.
'행복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리얼타임이란 걸!'
전하러 온 메신저 같다.
공원 벤치에 앉아 쉴 틈 없이 뛰어다니는 강아지 무리들을 보면
내 안의 죽어가는 세포들이 다시 기를 받고 일어나는 느낌이다.
저렇게 무언가에 푹 빠져 단순해지고 싶다.
천진난만한 강아지들이 누비고 다니는 잔디밭에
동상처럼 꼼짝 안고 자기만의 책을 읽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자기만의 여행을 떠났다.
그 책이 데리고 들어간 세계로 이미 떠나 있는 그들은
그 어떤 것도 신경 쓰지 않는다.
공원에서 책을 읽으면 책이 더 신나 있는 것 같다.
나무에 둘러싸여 있어서 그런지 고향에 왔다고 착각하는 것 같다.
어느새 공원을 다니며 책 읽는 일과가 패턴이 되었고
나는 그것에 <포틀랜드 북클럽>이라는 타이틀을 붙였다.
이름을 붙이니까 진짜 소속감이 생겼고
걸스카웃처럼 뭔지 모를 신나는 모험이 기다리는 것 같다.
인스타에 포틀랜드 북클럽 태그를 달았더니
가입하고 싶다는 리플이 종종 달린다.
가입조건은 포틀랜드에서 책을 읽으면 바로 클러버다.
해외에 살면서 한국 책을 붙들고 있다는 게 바보 같지만
매번 사악한 배송비를 들여가며 신간을 들이고 있다.
이북도 도전해 봤지만 도저히 종이책을 넘기는 손 맛을 포기할 수 없다.
어느 한 곳에 시간과 돈을 쓴다는 건 정말 사랑한다는 증거다.
결혼 전에 이점에 대해 깊이 상의한 적이 있다.
남편은 내가 책 사들이는 지금의 속도가 유지된다면
평생 1억 정도밖에 안 든다며 안심했다.
(정유정 작가는 남편이 한 달 책값으로 100만 원 서포트를 해줬다고 한다)
남편의 요상한 똥고집이 있는데 그건
1인 1 책을 추구한다는 거다. (아이스크림도 무조건 1인 1개다)
같은 책이 한 집에 두 권씩 있는 거, 나는 그게 용납이 안된다.
그래서 슬램덩크를 비롯한 겹치는 책들은 다 정리하고 왔다.
다행히 결혼 한 이후부터 그는 주식 경제 쪽 책만 사게 돼서
돈지랄의 참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어느샌가 우리가 사들이는 책은 구분이 되었다.
잔디밭에서 요가를 하는 사람도 있다.
뉴욕 센트럴파크의 단체 요가 행렬이 멋있게 보였는데
공원의 여백을 파고들어 혼자 수련하는 것도 괜찮은 것 같다.
풀과 흙냄새를 코로 훑으며
잔디의 간지러움을 발목으로 느끼며
지저귀는 새소리는 귀에서 사르르
얕은 바람결이 얼굴을 쓰다듬는 동시에
내 근육에 집중하기.
평생을 두고 천천히 해나갈 나만의 취미가 있다는 건 행운이다.
요즘 시스타가 그걸 증명하고 있다.
전과는 다른 결의 이너 피스가 느껴진다.
그 원동력은 요가원의 창문이라고 했다.
요가는 예전부터 해왔지만 달라진 건 바로
'통창으로 수런거리는 나무가 보이는 요가원'이라고 했다.
“난 여유가 되면 1:1 요가 과외받고 싶어.”
요가 개인 레슨보다 그녀를 바꾼 건 바로 그 창문이었다.
흰 벽을 보는 것과 움직이는 나무를 보고 몸을 움직이는 것은 다르다.
갑자기 포틀랜드에 사는 내겐 그런 요가원이 지천에 널렸다고 생각하니 조바심이 난다.
창문 하나가 사람 인생을 바꾼다. 아니 그 옆 사람 인생까지도.
시스타는 평소 아주 뾰족한 직언을 날렸는데
지금은 포근한 궁디팡팡의 마인드로 날 토닥여준다.
담배 못 끊는 남편을 다들 같이 욕하고 푸념했지만 시스타 만은 아니었다.
“형부한테 끊으라고 다그치지 말고 담배를 끊을 수 있게 영감을 줘,”
배를 만드는 사람에게 바다를 계속 보여주라는 거였다.
최근에 읽은 <지구인만큼 지구인을 사랑할 순 없어>
거기 나오는 곳이 신기하게도 모두 시스타와 함께 한 곳이었다.
그걸 읽는 동안 더 많은 곳을 시스타와 함께 하고 싶어 졌다.
뉴욕, 베를린, 대만 등 거의가 시스타의 해외전시 작업 중
내가 놀러 가 꼽사리 끼던 곳이었다.
그런데 신기한 건 같이 관광지를 돌아다녀 본 일이 없다.
되돌아보니 거기서도 시스타는 요가를 했고
그녀가 놀아주지 않아 거의 혼자 돌아다녔던 나는
장소를 바꿔 가며 책을 읽고 다녔다.
평생을 두고 계속해나갈 수 무언가가 있다는 건
든든한 베프가 생긴 기분이다.
그 베프가 특별한 건
내가 털어놓는 뒷말이 절대 새어나갈 일이 없다는 일이다.
그게 시스타에겐 요가였고 나에겐 독서로 선명해졌다.
그 일들은 풍경을 계속 바꾸어 가며 해나가고 싶다.
다음엔 나도 우리 집구석에 처박힌 요가매트를 꺼내와야겠다.
시스타가 포틀랜드에 놀러 오면 우리의 베이스캠프는 이 공원!
<포틀랜드 요가클럽> 바로 오픈이다.
https://youtu.be/NEbBPVAbLx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