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리차 Jul 18. 2021

자꾸만 할머니에게 반하게 돼

여름의 목소리

코로나가 휩쓸고 간 자리

여름이지만 얼어붙은 느낌이다.

휩쓸고 가는 척하더니 다시 돌아왔다.

이제 정말 그냥 같이 살아가야만 하는 공존의 시대라는 걸

받아들여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결혼식 대신 성대한 신혼여행을 계획했던 우리는

아직도 떠나지 못하고 있다.

국경을 넘지 못하는 영주권 신청 중인 신분이라

유럽은 포기했고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미국 내 재밌는 도시를 가려 생각 중이다.

플로리다를 생각했는데 아파트가 무너지는 큰 사고가 나서

쫄보들인 우리는 그쪽은 아주 멀리 미뤄뒀다.    


그런데 신혼여행이란 신인상처럼

오롯이 그 시절에만 느낄 수 있는 감각이고

시간이 지나면 그 기분과 느낌은 썩어버린다.

이제 이것도 받아들일 때가 온 것 같다.

굳이 신혼여행이라는 대대적인 행사 대신에

일상 속에서 자기만의 여행을 하면 되지 않을까?    

라며 우리는 조금씩 자주 돌아다닌다.


아침부터 서둘러 어딘가를 가는 것보다

느긋하게 자잘한 일들을 처리 후

가까 말까 고민이 들고야 마는 뒤늦은 오후 출발을 좋아한다.

이 작고 게으른 여행은 늦을수록 흥분감이 차오르는 것 같다.

목적지를 미리 정하기보다는 그날의 기분과 상황에 따라

인스타에서 본 사진 한 장에 요상하게 이끌려 떠난다.    



그곳은 카이트서핑의 천국이었다.

서핑과 패러글라이딩을 접목한 스포츠인데

각자의 연을 가지고 바람을 탄다는 게 신기했다.

남편은 엘에이 같다며 좋아했고

나는 서커스 같다고 좋아했다.

어떤 바람이 왔을 때 360도로 몸을 회전하는 걸 보니

바다에서 하는 서커스 같았다.    


더 가까이서 보기 위해 옷을 걷어 올리고 강을 건너 작은 섬으로 향했다.

정말 미스터리한 건 끊임없이 바람이 나온다는 거다.

바다가 아닌 강에서 잔잔한 파도가 무한대로 일렁이는 게 신기했다.

이 뜨거운 여름에 서늘한 찬바람이라니

한여름에 얼음이 어는 빙혈 같은 건가?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거대한 바람 샤워,

상쾌한 바람이 내 몸 구석구석을 훑고 지나간다.

온몸의 촉수가 다시 깨어나고

지겨웠던 내 일상에 생기가 들어온 느낌이다.

바람이 두 뺨을 찰싹 때리는 감촉만 으로도 새로워졌고

귀를 휘감는 바람 소리는 내 일생일대의 터닝포인트였다.  

  

유럽의 어느 음악학교에서는 악기 연주를 가르치기 전에

밖으로 나가서 소리를 듣는 감각을 키운다고 한다.

그제야 내 귀의 감각이 열린 듯했다.

바람소리는 내 영혼의 클래식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들었던 먼 북소리를

나는 그날 여름의 목소리로 들은 것 같다.

그날 여기에 오지 않았다면 평생 몰랐을 감각이다.


카이트서핑은 익스트림한 모습을 구경하는 것도 재밌는데

물 밖으로 나와서

각자의 카이트 줄을 정돈하는 손길에 요상하게 마음이 끌렸다.    

어린 꼬마가 겁 없이 파도로 달려들 때 나도 같이 용기가 생겼고

그 뒤를 보드 들고 따라가는 아빠의 등짝에 우리 아빠도 생각났다.    


제각기 다른 바람을 자기만의 속도로 타는 점이 좋은데

서로가 가까이 다가가면 엉켜버려서 둘 다 넘어진다.

그래서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해야만 하는 점이 섹시하다.

누구한테 기댈 수도 의지할 수도 없다.

오롯이 나 혼자만의 우주로 나아가야 한다.   

  

전신 슈트를 벗을 때 드러난 어떤 할머니의 존재도 좋았다.

그 할머니의 얼굴을 보았을 때

손끝을 스치는 아찔하고 소름 끼치는 느낌.

얼굴은 주름이 자글한 할머니인데

몸은 아이언맨 슈트를 입은 듯이 탄탄하다.

거기서 오는 언발란스의 아름다움

어쩌면 이 광경이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가장 경이로운 세계가 아닐까?

이 재밌는 것도 모르는 주제에

라고 말하는 듯한 장난스런 미소도 좋았다.

이 할머니는 그날부로 아이언맨 할머니가 되었다.

우리들의 대화에 앞으로 자주 등장할 것이기에 그녀에겐 이름이 필요하다.  

  

뜻밖의 장소에서 나는 워너비 할머니의 모습을 모으게 된다.

할머니들이 주는 이런 생생한 영감으로

오늘도 이 지루한 하루를 견딘다.    


돌아가는 길에 남편이

지난번에 무작정 찾아가서 좋았던

눈 산이 보이는 강에 가자고 한다.    


포도나무를 키우는 남프랑스 같은 농장 길이 나오자

나는 어차피 늦은 거

그냥 계속 기다렸다가 신혼여행은 지중해로 가자고 말했다.

지중해의 햇빛은 성격도 바꾼다는데 지금 바꿔야 할 거 투성이다.

언제가 되어도 좋으니 지중해의 햇빛을 쐬고

우리의 이 악마 같은 늦잠이 제발 고쳐지길 바란다.    

아무리 여름이라 해가 길지만

이렇게 헤매는 우리들에겐 역부족이다.

도대체 우리가 그때 갔던 그 스폿이 어디였는지

열심히 수색했지만 찾지 못했다.

결국 찝찝한 미스터리를 남기고

프로늦잠러들은

어둠 속에서 억지로 집으로 돌아왔다.


https://youtu.be/3GX_mQS6nlM

HoodRiver Waterfront Park
650 Portway Ave
Hood River, OR  97031
United States


작가의 이전글 시엄마의 팬이지만 그렇게 살긴 싫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