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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차 Jul 19. 2021

우리들의 점을 이으면 무엇이 될까

자기만의 여름방학

그럴 거면 포틀랜드 왜 갔어?

도서관에 처박혀 있는 나를 놀리는 친구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들려왔었다. 이건 과거다.

요즘엔 친구들도 내 일상에 관심이 없다.


미국이라는 곳이 더 넓은 세계인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좁고 단절된 곳에 갇혀 있는 것 같다.    

합법적으로 직업을 가질 수 없는 시점에 있는 나는

조금 긴 여름방학을 가진 느낌이다.

(영주권을 신청하고 기다리는 것 말고는 말해모해)


여름방학은 엄마가 억지로 보낸 여름 성경학교 때문에

늘 숨이 막혔지만

진짜 내 목을 조른 건 보여주기 식 동그라미 계획표였다.

나는 이 여름방학을 아주 적극적으로

비생산적이고 엉망진창인 일에 쓰려한다.

허송세월의 참맛을 보고 싶다.


이 성대한 방학의 시작을 기념하기 위해 스티브 잡스가

때려치웠다는 대학을 방문했다.   


Reed College
3203 SE Woodstock Blvd
Portland, OR 97202
United States


 

캠퍼스 전체가 숲이 우거진 협곡 자연보호구역에 위치해서

요상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학교의 첫인상은 학교라기보다는

데이트하기 좋은 공원으로 느껴졌다.

잡스는 어떤 사랑을 했을까?

알려지지 않았겠지만 분명 잡스는 이 캠퍼스에서

사랑에 빠지지 않았을 리 없다.


건물들의 미감이 낭만적이고

지루할 틈 없이 각각이 독보적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건물 사이의 아담한 여백들까지도 서정적이다.

걸음을 디딜 때마다 미묘하게 감정이 달라지는 캠퍼스다.    

학교 안에 흩어져 있을 아름다운 타이포그래피는 보지 못했다.

그 시절 잡스가 매료되었다던 그 조각들.

어쩌면 학교 건물 자체만으로도 내 눈엔 너무 벅찼기 때문에

그런 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글자들을 보지 못했어도 그것을 제외한 모든 것들이

이미 잡스에게 영감을 듬뿍 주었을 공간이었다.    


언덕을 이루고 있는 곡선마저 디자이너가 그린 것처럼 아름다웠다.

그가 새로운 타이포그래피를 만들어 낼 때

분명 이 언덕의 곡선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학교 중간에 오솔길처럼 귀여운 다리가 있는데

그 다리를 건널 때 주는 작은 흥분감도 좋았다.

비가 오지 않아 강이 녹차 떡으로 변해있었지만

그 안에서도 오리 가족들은 자기만의 일상을 소소하게 보내고 있었다.

계절감이 뚜렷한 한여름이었고

스티브 잡스가 거닐었을 사계절 모두가 궁금해지는 풍경이었다.

학교 식당보다 잡스가 콜라 빈병을 바꿔먹은 재활용센터가 궁금했고

주말에 7마일을 걸어가서 억지 예배를 본 후 성대한 식사를 얻어먹었다던 사원도 궁금했다.    


입양, 자퇴, 청강, 타이포그래피, 맥, 애플

이 점들을 이으면 스티브 잡스의 인생이 된다.     

그리고 괄호 안에는 주목받지 않은 인생의 점들도 분명히 있었다.

(스님, 사과농장, 콜라 빈병, 일요예배)

사과농장에서 히피 생활을 한 적도 있었고 스님이 되려고 한 적도 있었다.

나는 이 괄호 안의 점들에 요상하게 더 흥미가 생겼다.    


스티브 잡스는 입양아였는데

친엄마는 대학교육을 꼭 약속해 달라고 양부모에게 요구했다고 한다.

잡스는 6개월 대학을 다니다 보니

양부모의 노후 자금을 학비로 다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이게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생각하게 되었고 학교를 그만둔다.

(학비가 무시무시한 사립대였다.)

당시에는 두려웠지만 그게 인생에서 내린 최고의 결정이라고 한다.

때려치우는 감각에는 자기 자신을 믿는 용기가 포함되어 있었다.

학교를 관두고도 잘 될 거라고 믿음은 어디서 나온 걸까?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가 나온다.

자퇴를 하니 관심 없던 필수과목 대신

진짜 듣고 싶었던 강의를 청강할 수 있어서 좋았다고 한다.

캠퍼스 여기저기에 멋진 캘리그래피로 된 포스터와 사물함 라벨들에

요상하게 끌렸다고 한다.

잡스는 자기만의 느낌을 갖게 되었고 그걸 소중히 여겼다.

자퇴를 하고 친구의 기숙사에 살면서 캘리그래피 수업을 청강한다.

이 수업이 인생에서 어떤 식으로 적용될 것인지 모른 채

과학은 따라갈 수 없는 섬세한 예술에 매료되어 1년 넘게 수업을 듣는다.

나는 그 시간이 스티브 잡스의 여름방학이었다고 생각한다.

마음껏 무언가에 빠져보고 미쳐볼 수 있는 시간.

숙제 같은 건 뒤로 미뤄두어도 괜찮은 시간.    


나중에 그 캘리그래피는 매킨토시 컴퓨터를 설계할 때 엄청난 자양분이 된다.

그렇게 잡스는 미려한 서체를 가진 최초의 컴퓨터가 탄생시켰고

어쩌면 그가 자퇴를 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그때는 몰랐지만 10년 지난 후 과거를 돌아보았을 때

모든 게 분명히 보였다고 한다.


우리는 미래의 점을 이을 수 없고

과거의 점들만 이을 수 있다.

이런 점 들이 미래에 어떤 식으로든 이어진다고 믿어야 한다.

이게 잡스의 스탠퍼드 졸업식 연설문이었다.     


이 리드대학교에서 가장 가보고 싶었던 도서관은 남겨두었다.

사실은 문이 닫혀있어서 못 들어갔다.

잡스의 캘리그래피 교수 작품과 맥킨토시가 함께 있는

그 광경은 보지 못했다.

그런데 사실 보지 못해서 좋았다. 앞으로 보게 될 테니까

마음만 먹으면 다시 올 수 있는 거리에 살고 있다.

언젠가 이 학교와 재회할 테고

그때는 도서관만 집중적으로 탐방해 보고 싶다.


오늘의 방문이 내 인생의 희미한 점이 되겠지만

이게 어떤 점과 연결될지 생각해본다.

캠퍼스를 빠져나오면서 살며시 무언가가 떠올랐다.    

바로 테디베어 인형 만들기다.

에쿠니 가오리 소설 <달콤한 작은 거짓말>의 여자 주인공의 직업이

테디베어 인형 작가인데 취미 삼아 시작해 점점 빠져들었다.

결국 1년간 영국에서 공부해 전시나 광고용으로 쓰이는 단 하나의 인형을 만든다.


그전에는 전혀 생각해 보지 못했던 일이다.    

어떤 작은 느낌도 그냥 스쳐 보내지 않고

다 붙들어서 내 것으로 만들어 내고 싶다.

오직 호기심이나 직감으로 흘러가 보고 싶다.

인생의 사소한 점들이 어떻게 연결될지 모르는 넉넉한 시간이

지금 내게 와 있고

나는  여름방학을 아주 느긋하게 보낼 예정이다.

그리고 궁금해진다.

우리의 이 점들을 이으면 무엇이 될지


https://youtu.be/3Ox7GmB3R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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