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일기예보
“마흔이 넘어서 결혼하거나
그때도 결혼을 안 했으면, 외국에 나가서 공부할 팔자예요.”
용하다는 사주쟁이가 내게 했던 말이다.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저 말처럼 되기 위해 노력했는지도 모르겠다.
저 말대로 외국에 나오게 되었다.
방송작가 시절 심장이 찢어지도록 힘든 프로그램을 할 때
정신과를 찾아 간 적이 있다.
그런데 상담을 하면 할수록 더 숨이 콱 막히고 돈이 아까웠다.
나는 내 이야기를 말하고 싶다기보다는 듣고 싶었던 것 같다.
그날 정신과를 나오면서 재빠르게 사주상담을 예약하고 오후에 찾아갔다.
사주쟁이는 내가 답답한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 주었고
힘든 부분에 대해 내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지,
이 위기를 어떻게 넘겨야 할지 알려주었다.
사주를 기반으로 정신과 상담을 하는 전문의 책이
나왔다고 해서 흥미롭게 읽었다.
그 책에 따르면 의학적 소견에 통계학적인 사주라는 걸 콜라보했더니
환자들에게 더 효과가 있었다고 한다.
그 사실에 요상하게 마음이 이끌렸다.
그때부터 나는 엄청난 돈을 탕진해가면서
내가 듣고 싶은 말이 나올 때까지 사주를 보러 다녔다.
너무 절실했기 때문에 유명하다는 집은 다 찾아갔다.
어떤 결정을 해야 할 때 사주에게 힌트를 얻었고 후회를 줄여나갔다.
사주를 하도 많이 보러 다녀서 이제는 패턴이 읽히기 시작했다.
사주는 결론적으로 통계학이기 때문에 큰 흐름이나 줄기는 비슷하다.
미신이 아니라 어마어마한 빅데이터다.
그걸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학문이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유튜브를 통해 사주를 공부하고 있었다.
다들 BTS 덕질할 때 나는 사주 덕질에 한참 신이나 밤을 새웠다.
돈, 시간, 영혼 다 내어주어도 아깝지 않고 재밌었다.
그러면서 내 주변인들의 고민을 들어줄 때
사주를 같이 봐줬더니 즉각적이고 실용적인 어드바이스가 되었다.
그때 '도움이 된다'는 짜릿한 맛을 제대로 본 후
난 그것에 중독되었다.
선배가 프로그램 제의가 들어왔다고 고민을 털어놓았다.
나는 그 프로는 곧 없어질 거니 하지 말라고 했다.
정말 그 프로는 없어졌고 선배는 계속 내게 고민을 상담했다.
그러는 동안 내 실력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인생의 묘미란 이런 것이었다.
상대가 내게 의지를 하는 동안,
나는 계속 더 발전할 수밖에 없는 것.
내가 누군가를 도우려는 순간,
저절로 내가 커지게 되는 신비로움을 알게 됐다.
친구가 청약을 넣었다 길래 나는 이사 준비하라고 했다.
그 친구가 정말 어려운 확률을 뚫고 당첨이 됐다고 했을 때
좋으면서도 한쪽 구석은 두려웠다.
더 실력을 갈고닦아야 된다는 생각뿐이었고
더 본격적으로 내 시간과 돈, 온통 갈아 넣었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기쁨도 크지만
이걸 공부하고 나서 나 자신에 대해 더 잘 알게 됐다.
왜 정리 같은 거 잘 못하고 끝맺음이 약한지,
시작이나 발동은 쉽게 걸리는데 결과물이 미진한지에 대해서...
그걸 알게 되면서 나 자신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도 알게 됐다.
그리고 가까운 지인이나 가족에 대해서도
'아 이래서 이 사람은 이런 게 취약하구나, 이래서 이런 거에 집착하는구나'
다른 각도로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그것만으로도 내 인생은 풍성해지는 것 같았다.
사주는 인문학과 심리학 등 모든 게 믹스매치된 미친 매력의 학문이다.
사람마다 느끼는 정도는 다를 테지만 사주는 인생의 일기예보이며
일기예보처럼 맞기도 틀리기도 한다.
다만 내가 ‘일기예보를 미리 알고 체크할 수 있다’는 그 안도감이 중요한 거다.
“어차피 인생은 힘들어요 하지만 우리에겐 참고할 시험 족보가 있답니다.”
딱 요런 느낌이다.
너무 든든하지 않나? 한국 사람들은 이렇게 기댈 곳, 비빌 언덕이 있다.
난 이 사주라는 것이 고유한 K문화라 생각 되었고
이걸 누리며 사는 한국인은 행운이라 생각한다.
전 세계 외국인들도 이 맛을 알면 좋겠다 생각했다.
K팝, K드라마, K뷰티, K푸드 다들 아는데 이 K사주는 아직 모르는 것 같다.
이 좋은 걸 나만 알 수 없지!
좋은 건 나눌 수록 더 좋은 것!
그래서 내가 퍼트려보기로 했다.
Slowly라는 영어편지 어플을 통해 이 실험을 조금씩 해나가고 있다.
이 어플은 실제로 편지가 도달하는 시간만큼 기다려야 답장을 받을 수 있다.
이 기다림의 아날로그 갬성이 매력적이다.
4계절이 있는 곳이면 외국이라도 상관없이 사주를 적용할 수 있다.
처음엔 외국인들이 이걸 궁금해할까 싶었는데
국경과 언어를 뛰어넘어 인간의 고민은 거의 비슷했다.
진로와 사랑에 대한 고민, 어떻게 하면 더 잘 살 수 있을까는 같았다.
하와이에서 방금 막 도착한 편지,
요즘 이 어플을 열어보는 게 내 일상의 큰 설렘이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자기의 인생을 털어놓고
고민을 상담한다는 게 정말 신기하면서도
내가 그 사람 인생에 영향을 끼친다는 책임감이 무겁다.
같은 지구에 살면서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되고 우정을 나누게 되는 것도 재밌다.
나만이 쌓아 나가는 인생의 단짠 맛의 데이터도 흥미롭다.
‘도움이 된다’는 느낌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근사한 기분이다.
“그래서 니 사주는 어때?” 가끔 친구가 물어본다.
“난 박막례 할머니처럼 아주 늦게 꽃피는 팔자야.”
정말 좋은 대운이 80대에 오다니 조금 서운하다.
그런데 박막례 할머니를 떠올리면 에너지가 차오른다.
그때가 되면 전 세계인을 대상으로
아마 K사주계의 BTS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셀럽들이 나를 만나려고 번호표 뽑고 기다리고
보그 화보도 찍고 SNL에 나갈 수도 있다.
미국에 오기 전엔 생각지도 못했던 꿈이다.
사실 그런 화려한 것보다는
내가 해준 말이 한 사람의 인생에 작은 용기가 되었으면 한다.
내가 몇 년 전 그랬듯이,
내가 무심코 들었던 예언을 그렇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듯이,
그 별거 아닌 가능성을 끝까지 붙들어 주었으면 한다.
나는 그 증거를 조금씩 수집해 나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