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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차 Jul 26. 2021

사랑하지 않으면 떠나보내는 게 예의

야반도주 꿈나무

우리 집엔 코리아 덕후가 산다.

한국 갈 때마다 구청에 들러 태극기를 사고

하루라도 한식을 먹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

탈북민 토크쇼 <지금 만나러 갑니다>를 보면서 자기 일처럼 운다.

그 울음을 보고 있으면

난 아직도 그가 북에서 온 게 아닐까 하고 종종 의심이 된다.


한국을 열렬이 추종하지만 종종 남편이 미국 사람이라는 걸 깨달을 때가 있다.

쇼핑을 너무 좋아하고 열심히 한다.

같이 사는 나도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한다.    


남편이 수박을 숟가락으로 깨작거리다가

맛이 없다고 그냥 쓰레기 통으로 던져 버린다.

그건 평소 그의 일상이었지만 나에겐 사건이었고

그걸로 우리는 100분 토론을 벌였다.

아무리 수박 하나가 커피 한잔 값인 미국이라지만

너무 기가 막혔다.

무언가가 낭비되고 있다는 기분에 분노가 치밀었다.


같은 기분으로 나는 코스트코 가는 게 싫다.

이미 예견된 낭비를 내 돈으로 사는 바보 같다.

그는 세일에 당장 달려가지 않으면 안 되는 소비 요정이다.

쿠폰의 노예이며 스타벅스도 기프트 카드로 바꿔 써야 안도감을 느낀다.

뭔가를 싸게 샀다는 기분이 인생의 즐거움인 사람이다.

이런 게 가끔 진절머리 날 때가 있다.     


나도 어쩔 수 없이 이런 사람과 살다 보니 맥시멀 리스트로 살지만

내 꿈은 언제든 야반도주가 가능할 정도로 가볍게 사는 거다.

그 마음을 행여 잃어버릴까 집구석은 맥시멀이지만

미니멀리스트와 관련된 책을 끊임없이 사들인다.    


그런 나는 사는 것보다 비우는 기쁨을 알게 해주고 싶었다.

나도 처음엔 처분하는 것이 두려웠다.

이민 오기 전, 작은 것들조차도 당근 마켓에 처분해

그걸로 주식을 사는 전환의 즐거움을 맛봤다.    

물건과 나와도 결국 다 시절 인연이다.

한때 열정적인 사이 지만 영원할 수 없다.

그 시간이 지나면 회복될 수 없는 끝난 관계다.

그 관계는 종종 내 눈에 띈다.

내 눈엔 다 끝난 사랑을 혼자 붙들고 있는 느낌을 여러 번 가졌다.

그게 바로 차고에 처박힌 남편의 오토바이다.


마침 테슬라 주식이 떨어져서 오토바이를 팔아서 더 사자고 남편을 꼬셨다.

그는 테슬라를 사랑하지만 오토바이는 절대 팔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이유는 그 오토바이와 자기와의 추억 때문이라는데

못 말리는 첫사랑처럼 대단한 뭐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토바이 면허를 딸 때 복장 규정 같은 거 모르고 그냥 갔다가

타보지도 못하고 어이없게 떨어졌다고 했다.

오토바이 시험에는 가죽 부츠를 신어야 해서

그 부츠를 사신고 다시 시험을 보러 갔던 추억이 소중하단다.

그 규정도 웃겼지만

그 추억 때문에 저 고철덩어리를 팔지 않는 게 더 기가 막혔다.    


차라리 나는 가만히 모셔두지 말고 제발 오토바이를 타라고 했다.

그랬더니 나중에 탄단다.

어디서 본 건 많아가지고 나는 거기다가 대고

“할리데이비슨 광고에서도 그랬어

언젠가 탈 거야

근데 언젠가라는 요일은 없다고

지금이 아니면 다 소용없다는 말이라고.” 했다.

그랬더니 이번엔 타는 거보다 그냥 그 자리에 놔두고 보고 싶단다.    


그건 처음으로 자기 손으로 벌어서 사본 자신의 버킷리스트였고

그걸 이뤘다는 감각을 오래 간직하고 싶었던 것 같다.

당근 마켓이 포틀랜드에 있었으면 내가 몰래 팔았을지도 모른다.

(뉴욕에는 있다고 하네요)


나는 오토바이에 한번 앉아 보았다.

새것이었지만 이건 영원히 이 차고에서 썩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제발 그만 질척거리고 깨끗하게 보내 주자’

이제 정말 때가 된 것 같다.

돈을 떠나서 이 오토바이가 달려보지도 못하는 운명이 불쌍했다.

다른 주인을 만나서 마음껏 펼쳐 볼 기회를 주고 싶다.    


주말이면 동네에 가라지 세일을 하는 포스터가 붙는다.

미국 사람들은 차고에서 자기 집 물건을 통째로 팔아치울 때가 있다.

당근 마켓 거래 1000번을 한방에 하는 느낌이랄까?

번뜩 생각 난 게 어차피 집 앞이니까 이 집에 묻어가면 어떨까 싶었다.

한쪽 구석에서 이 오토바이를 팔면 안 될까 하는 생각에 기웃거렸다.

매번 지나가는 이웃집이지만

늘어놓은 물건들을 보니 그 사람의 세계가 선명하게 보였다.

빈티지 프리마켓에 따로 가지 않아도

주인의 취향이 내 취향을 제대로 저격하는 날이면 정신을 잃고 구경한다.

내 눈엔 우아하게 엔틱하고 예쁜 것들인데

어째서 이걸 파는 걸까? 싶었다.

그냥 보통 가정집에서 쓰던 물건 들이라기엔

하나하나가 너무도 아름다웠다.

‘아니 왜 빈티지 편집샵이 우리 집 앞에 있죠?’

주인이 긴 시간에 걸쳐 조금씩 쌓아온 취향들이다.

한때 진심으로 몰두했던 세계들이다.

여기서 발견한 오르골이 있었는데

뜨아! 하고 뒷걸음질 처질 정도로 오래된 것이었다.

내게도 선물 받은 오르골이 있었는데

그것만 생각하면 쓰라린 흑역사가 튀어나와서 결국 버렸다.

역시나 물건을 버려야 거기에 묻은 감정도 나를 떠나갈 수 있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인생의 불안함 속에

그 요리책이, 그 커피 메이커가, 체코 여행에서 산 인형이

아마도 그 사람을 지켜줬을 것이다.

진심으로 자기 손으로 구축한 자기만의 세계였을 것이다.

좋았던 날도 별로인 날도 최악인 날도

이렇게 만들어 놓은 자기만의 천국이 있어서 버텼을 거다.    

‘이 사람 이걸 다른 사람 손에 넘기고도

살아갈 수 있는 거야?’

그런 생각에 사로 잡혀

막상 무언가를 사지도 못한 채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같은 시선으로 저 오토바이의 존재를 긍정해보려 했으나

도저히 역시나 역부족이다.

저 오토바이에겐 미안하지만 주인의 사랑은 이미 끝난 것 같다.

그는 오토바이를 팔아버려도 잘 살아갈 사람이다.

내가 몰래 팔아버려도 며칠은 모를 까바 조금 무섭다.


보내주어야 하는 게 내 도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더듬는 순간에 알아 버렸다.

저 오토바이가 왜 그렇게도 요상하게도 꼴 보기 싫었는지를...

그건 예전의 나를 보는 것 같아서였다.    


사랑하지 않으면 떠나보내주는 게 예의라고

당당하게 말하지 못한

그때의 나를 보는 것 같아서


https://youtu.be/EUkwkOUqX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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