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가 포틀랜드에 산다

보리차 호텔 메뉴얼

by 보리차

호텔보다 친구 집에서 자는 게

10배로 더 큰 행복감을 느낀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사실 이런 연구결과는 없다.

내가 나를 연구한 결과다.


이민 오기 전 집을 처분하고 비행기 타는 날까지

갭이 생겨 친구 집에서 얹혀 지낸 적이 있다.

원래 호텔에서 지내려고 했는데

그랬으면 어쩔뻔 했어? 할 만큼

뒤돌아보니 요상하게 재밌는 시간이었다.

그 전까진 친구들이 우리 집에 오는 게 싫었다.

왜냐면 정리를 안 하고 사는 인간이라

손님이 오면 안 하던 청소를 해야 하기 때문에.


하지만 내겐 청소를 잘하는 동지가 생겼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변했다.

나는 인생을 오래 살고 싶지 않다.

그저 재밌게 살면 끝이다.

"재밌게 살고 있니?"

이게 내 안부 인사고 친구들에 대한 유일한 궁금증이다.


친구들 재우는 재미도 없이

도대체 무슨 재미로 인생을 산다는 거지?

유튜브 <내 친구가 포틀랜드에 산다>도 그런 의미에서 만들고 있다.

친구들이 도망치고 싶을 때 언제든 와줬으면 한다.

다음은 나의 친구들에게 보내는 초대장이다.


이곳 <보리차 호텔>은 미국 서부 포틀랜드에 위치한 곳입니다.

포틀랜드는 사실 동부에도 하나 더 있습니다.

헷갈리시면 안 돼요.


숙박료는 1박에 책 한 권,

대신 이 호텔에 이미 있는 책이라면

페널티로 저녁식사를 만드셔야 합니다.


체크인을 하실 땐 여기서 사용할 이름을 만드셔야 합니다.

도착하자마자 떠오르는 무언가로 이름을 만들어 주세요.

여기선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청산가리가 떠오른다면 청산가리도 상관없어요.

그럼 우리는 당신을 청산가리님으로 부를 거고

당신은 청산가리가 되는 겁니다.


샴푸린스 이런 거 제발 싸오지 마세요

이곳에 마련된 어메니티를 충분히 즐기시기 바랍니다.

처음 써보는 치약이 주는 새로운 감각,

낯선 비누가 주는 미묘한 느낌,

익숙하지 않은 샴푸 향을 만끽하세요.


대신 빈 케리어를 준비해 오시기 바랍니다.

여기는 세일 텍스가 없기 때문에 가격도 싸지만

내가 덕질하는 무언가에, 흥청망청 탕진해보는 기쁨이 있어요.

말라붙은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살아나요.

달리기를 좋아하신다면 나이키 본사 옆 아웃렛에서

싹쓸이를 하셔도 좋고요.

책을 좋아한다면 파월 북스에 가서

책 이외의 에코백 같은 굿즈를 잔뜩 사셔도 좋아요.

알람 같은 건 없어요

새소리가 이미 당신을 깨웠을 겁니다.

눈뜨자마자 침대 옆에 놓인 생수로 입을 헹구고

파자마 바람으로 작은 산책을 해도 좋아요.

이 호텔에선 59초 만에 공원으로 갈 수 있고

산책 나온 댕댕이 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활력이 차오를 겁니다.

조식은 뒷마당에서 내리는 핸드드립과

제철과일이 듬뿍 올라간 팬케익입니다.

다만 당신이 늦잠을 잤을 경우에만 먹을 수 있어요

포틀랜드는 아시다시피 랜드마크 같은 게 없어요

누군가에겐 시애틀과 샌프란 사이에 있는 그냥 작은 도시일 수도 있지만

이 도시를 왔다는 건

당신은 커피나 맥주나 와인 이중에 하나는 진심인 사람입니다.

아마도 당신은 이미 유명한 브런치 카페에 나가고 없겠죠.

이 호텔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도서관이 있어요

도서관 앞엔 작은 공원이 있는데

토요일 오전에 요가 수업이 열려요.

공복으로 요가를 하고 바로 옆 파머스 마켓에서

샌드위치와 커피를 먹는 것도 좋아요.

오후에는 그냥 발길이 닿는 곳으로 아무 곳이나 가도 좋아요.

목적지를 정하지 말고 그냥 버스나 열차를 타고 길을 잃어보세요

헤맬수록 정확해지는 마음을 확인해 보세요.

풍경은 거둘 뿐, 나 자신과의 독대가 제일 재미나는 여정입니다.

포틀랜드는 자기 자신에게 여백을 선물하기 가장 좋은 도시입니다. 그러고 나면 나자신을 돌보는 방법도 보너스로 알게 됩니다.


밤이 되면 이 호텔에 있는 와인은 무제한입니다.

그리고 사주와 타로 서비스가 제공됩니다.

서울에 있을 땐 무언가에 치여서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느껴질 겁니다.

지금 가장 당신을 괴롭히는 문제를 해결해 드립니다.

앞으로의 당신의 일기예보를 들어보세요.

이 호텔을 오기 전과 후의 당신은

분명 달라져 있을 겁니다.

이 호텔의 가장 큰 자랑, 손편지 액자입니다.

이곳은 손편지 쓰는 소파입니다.

예전의 내가 아니라 지금의 '청산가리'로 편지를 보내보세요

계절에 상관없이 무언가로 차오르는 내 마음이 제철입니다.


이 호텔의 매력은 ‘그럴 거면 포틀랜드 왜 갔어?’

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서울과 비슷한 일상을 보낼 수 있다는 겁니다.

당신이 하던 루틴을 이곳에서 계속 유지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서울에서의 나와

포틀랜드에서 나는 분명 달라져 있겠죠


체크아웃을 하실 땐 다른 이름으로 하셔야 합니다.

청산가리로 이 호텔에서 며칠을 보내셨다면

돌아가실 땐 다른 이름을 만드셔야 합니다.

그게 만약 불나방이라 라면

이곳에서 '청산가리에서 불나방이 되는 시간'을 보내신 거죠.

그 시간이 혼자서만 가끔 꺼내볼 수 있는 달콤한 비밀연애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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