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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차 Jul 30. 2021

여행 가서 겉멋 부리는 인간을 어트케 안 사랑해

결혼 뒤에 숨은 나의 개수작

마사지를 끝으로 우린 공항에 갈 참이었다.

그런데 우리 짐을 전부 실은 택시가 없어졌다.

만난 지 10일 만에 발리로 여행 간 인간들에게 벌어진 참사였다.    

 

남편을 소개받은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다.

“내가 소개팅 시켜줄게.”

일로 만난 사이인 대표가 미팅 자리에서 꺼낸 사적인 이야기에 놀랐다.

공적인 사이에서 사적인 연결을 하려는 마음,

그게 얼마나 소중한지 알기에

그 마음만으로도 응하고 싶었다.     

“학교 선배라서 내가 보장하는 사람이야.”

확신에 차 있는 목소리가 나를 흔들었다.


그런데 연구원이라는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완강하게 거부했다.

왜 한국에선 어느 학교를 나오고 어디에서 일하는지가 중요한지 모르겠지만

나의 기준은 학교와 직장이 상관없었다.

단지, 나와 여행을 같이 갈 수 있는 사람! 이거면 됐다.

그 말인즉,

바로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거다.    

 

그 대표는 이렇게 좋은 조건을 왜 마다하는지

이해가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남들이 좋다는 그 조건이 나에겐 최악이었다.     

장사꾼의 딸로 자라서 그런지

보고 배운 세상이 그런 거라 그런지

넥타이 매고 출근하는 사람보다

백수처럼 자는 아빠가 멋져 보였다.   

  

남편은 자영업자였기 때문에 시간에 자유롭고

나처럼 평소에는 거지처럼 살아도

여행에 만큼은 사치를 부리는 사람이었다.     


참 요상하게도 그 대표가 제안한 그 소개팅 때문에

당시의 남편이 더 선명해졌다.

난 함께 여행 다닐 사람을 원했고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없다면

대통령이라도 대통령 할아버지라도 싫었다.     


그 소개팅 제안 때문에 내 맘이 빛의 속도로

남편에게 기울었고

그게 기폭제가 되어 우리 사이는 가까워졌다.     

인생에선 내 것이 아닌 게 주어지면

오히려 진짜 내 것이 무엇인지 확신을 갖게 된다.     


나는 결혼을 원한 게 아니라

같이 여행을 다닐 파트너가 필요했는지 모르겠다.

그게 내가 그려온 빅픽쳐였고 결혼이란 건

어쩌면 그냥 여행을 거들뿐이다.     


같은 곳이라도 누구와 가느냐에 따라 너무 다른 내가 된다.

선배와 발리를 갔을 땐 미술관을 다니고 예쁜 우붓 가게 쇼핑을 했다.

물론 그 시간도 좋았지만

그때 당시 남자 친구였던 남편과 갔을 땐 정 반대의 추억을 쌓았다.

오토바이 하이킹이라니!

발리만이 가진 아주 매력적인 코스가 있다는 것도 몰랐고

오직 그걸 하러 온 사람이 많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4륜 오토바이를 처음 타봤는데 왠지 내가 뒤에 타는 건 싫었다.

앞에서 내가 운전하고 그가 내 허리를 잡고 기대었다.     

뺨에 스치는 바삭한 바람과 촉촉한 풀냄새,

파워풀한 스피드가 주는 해방감.

수많은 연애를 해봤지만

이런 감각이 차 오른 건 처음이었다.

누군가가 나에게 의지하는 원초적인 느낌.

그건 내가 기대는 것보다 훨씬 짜릿했다.

장화 속에 진흙이 들어가 발이 퉁퉁 부어도

신나기만 했다.      


누군가와 같이 정글이 우거진 곳에서

이런 걸 타보는 건 처음이었다.

한 사람만이 나를 데리고 가는 새로운 세계가 있다.

혼자 있을 때는 보지도 겪지도 못하는 낯선 세계      


그 뒤로 갑자기 비가 왔고

그는 래프팅 예약을 이미 해놨다며 비를 맞고 하자고 했다.

난 비 맞고 그런 액티비티를 하는 게 싫었다.

이 비를 즐기면서 커피를 마셔야지

왜 이걸 맞고 래프팅을 하냐고 우겼다.

업체 사장님까지 나서서 날 설득했다.

맑은 날보다 비 오는 날이 더 재밌다고 했다.

그럼 혼자 래프팅하고 오라고 했다.

나는 여기서 비를 즐기며 책을 읽겠다고    

 

결국 난 비를 구경하며 책을 봤고

그는 내 옆에서 업체 사장과 수다를 떨며 날 방해했다.


그에겐 놀라는 재능이 있는데

처음 보는 사람과도 계속 화수분처럼 이야깃거리가 샘솟는다.     

남편은 택시를 타건 우버를 타건

기사님을 혼자 인터뷰라도 하듯이 계속 대화를 나눈다.

나는 평소 택시를 타면 조용히 음악을 듣는 편인데

막상 그 수다를 구경하고 있으면 재밌다.     


그는 택시 기사님과 수다를 떨다가

내일 하루 투어도 같이 하자고 했다.

택시 기사는 너무 좋아했고 우리와 하루를 같이 보냈다.

마지막 코스로 마사지 샵을 갔는데

남편은 택시 기사 꺼 까지 쿨하게 결재했다.

별 것 아닌 선의였지만 분명 감동 적이었다.

그런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행동으로 바로 옮기는 게 찐이다.

택시 기사는 이런 손님은 처음이라며 페이스북 친구를 맺자고 했다.     

그는 가끔 내가 생각하지 못한 종류로 겉멋을 부릴 때가 있는데

그 순간만큼은 '이러니 어트케 안 사랑해'


여기 살지만 마사지는 처음 받아 본다는 택시 기사.

나도 여행은 꽤 다녔지만 택시 아저씨와 이런 추억은 처음이었다.

즐거운 마음으로 마사지를 받고 나왔고

이제 밤 비행기를 타러 공항으로 갈 참이었다.

우리의 짐은 모두 그 택시 트렁크에 있었다.

그런데, 택시가 사라졌다.     

눈앞이 캄캄했고 도저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잠깐만요, 우린 여기 와서 충분한 액땜을 했다고요!

핸드폰이 물에 빠져서 그거 고치겠다고

발리까지 와서 아이폰 수리 센터에 많은 돈과 시간을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게 진짜 우리에게 벌어진 일이라면

너무한 거 아닌가?   


아니면 이건 복선인가

나중에 큰일이 벌어지니 이딴걸로 놀라지 말라는

신의 언지인가?

  

그를 원망했다.

왜 그런 호의를 베풀어서 이 상황을 겪게 하냐고 다그쳤다.

그도 처음에는 천천히 찾아보자고 너스레를 떨었지만

비행기 시간이 다가오자 얼굴이 점점 사색이 되어 갔다.

케리어 안에는 내 노트북이 있었고

그 안엔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대본이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택시를 찾아 한참 헤매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질 것 같은 순간,

어둠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한 남자가 우리에게 손짓했다.

현지인들이 가는 진짜 맛집에

우리에게 줄 망고주스를 사러 갔었다고 했다.     

이 우정 앞에서 할말을 잃었다.


그 순간 우리가 함부로 의심한 것에 대해

너무 구리 구리 했던 나 자신에 대해

이걸 오해한 죄로 어떤 천벌을 받을까?

오만 생각이 범벅되어 창피하고 부끄러워 멀미가 날 것 같았다.    

 

남편이 처음 울었던 날이 생각난다.

자다가 갑자기 그 발리 택시 기사 눈빛이 생각난다며 울었다.

(난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울 일은 아니라 생각했다)

레스토랑에서 고생스레 일하다가 드디어 택시기사가 된

그 아기 아빠가 생각난다며 울었다.

아무리 그렇게 핑계를 댄다 해도

분명 자기 자신이 멋있어서 운 게 아닐까?라는 의심을 거둘 수 없다.     


여행이란 망할수록 커지는 기쁨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되돌아보니 혼자 갈 때 보다

같이 갈 때 망하는 스케일도 커진다.

앞으로 우리의 여행이 어떻게 망할지 궁금하고

나의 개수작이 조금은 성공한 것 같다.  

   

평소의 남편은 글쎄 잘 모르겠다.

그러나 하나 분명해진 게 있다.

여행 가서 남편이 부리는 겉멋을, 나는 확실하게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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