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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차 Aug 04. 2021

인생은 냉면먹는 여름방학처럼

여름의 모티브

         

요즘 고민은 자기 전에 냉면이 먹고 싶다는 거다.

여기서 중요한 건 오늘 먹었는데 마치 오래전에 먹은 사람처럼

그게 먹고 싶어 견딜 수 없다는 거다.

그렇다고 지금 먹으면

내일 먹을 냉면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다.

한마디로 냉면 병에 걸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여름이 되고 매일 1일 1 냉면 하고 있는 나였다.

너무 중독된 거 같아 오늘 하루는 참아 보려 했다.

살다 보니 냉면을 참아야 하는 날도 다 오는구나...


사실 내게 있어 냉면은 그냥 고기 먹을 때 디저트였다.     

한참 중국으로 출장 다니던 시절

어느 날 너무 우래옥 고기가 먹고 싶어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케리어를 끌고 혼자 고기를 먹으러 갔다.

당연히 혼자 고기를 굽고 냉면을 먹는 사람은 나 혼자였다.

나오는 길에 어떤 2인조가 말을 걸었다.

형사가 잠복근무하고 있다가 범인을 낚아채듯 재빨랐다.

냉면을 먹는 모습을 보고 '우리과' 라는 걸 알아차렸단다.

그러더니 커피 한잔 할 수 있냐고 했다.

자기들의 차를 타고 가자고 그러는데 나는 그날 이후로

인신매매단에 팔려 러시아 꽃게잡이에 끌려갔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요상하게도 그들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따라가게 됐다.     

커피를 마시면서 ‘냉면 DNA’가 있는 사람들을 만날 때

너무 반가워서 가만히 있지 못한다고 했다.

냉면을 통해 깊숙이 서로의 마음이 통한 듯

냉면으로 시작해 냉면으로 끝나는 이야기만 했다.

솔직히 나는 그렇게 까지 냉면을 사랑하지 않았고

그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에 장단을 맞추는 것이 미안했다.


그런데 지금은 입장이 바뀌었다.

냉면 쟁이를 발견하면 내가 커피를 사주고 싶은 심정이다.

냉면 쟁이들이 서로를 알아봤을 때의 반가움!

이제야 냉면에 미친 사람의 구체적 실감을 얻게 됐다.

그들이 말하는 냉면 DNA,

아주 깊숙이 오래도록 감쳐줘 있던

그것이 올여름에 포텐이 터지고야 말았다.

시간이 지나고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어리둥절했던 냉면 쟁이들과의 만남이

내 냉면 라이프의 프리퀄이 되었다.     


냉면이 은근히 칼로리도 높고 살찌는 음식 1위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냉면에 내 영혼을 다 내어줄 준비가 되어 있다.

더 맛있는 냉면을 먹기 위해 수영을 시작했다.

냉면을 더 자주 먹기 위한 휴식기도 챙겼다.

오늘만은 냉면 대신 따뜻한 밥을 먹자고 생각한 날이었다.   

  

수영장에서 트와이스 노래가 나왔다.

BTS와는 다른 느낌의 감동이다.

가뜩이나 눈부신데 새로운 별이 뜨고 있었다.

그 순간 집중력을 잃고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빨리 씻고 나가서 냉면을 먹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이런 날 냉면을 안 먹으면 언제 먹는담? 하며

차오른 국뽕처럼 내 입맛도 차올랐다.

오늘은 비빔으로 먹을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맘대로 하라고.”

여기는 분명 미국이 맞는데 순간 잘못 들었나 싶었다.

일방적으로 아이에게 화내는 목소리였다.

탈의실 한켠에서 선명하게 들려오는 한국말

“나도 내 맘대로 할 테니까 알아서 해”

외국어이지만 잔뜩 화가 난 목소리가 번지자

모두 표정이 굳었다.     

도대체 어떤 꼬마가 엄마를 화나게 했을까? 하고

궁금해 나도 모르게 고개를 빼꼼 내밀고야 말았다.

그런데 거기엔 그 어떤 꼬마도 없었다.

혼자 수영복을 입을 수 없는 늙은 노인이 있을 뿐이었다.

그 광경은 매 순간 수발을 들어야 했던 엄마의 투병 시절로 날 데려갔다.

나도 저렇게 엄마에게 화냈던 순간이 딱 한번 있다.

그 순간은 정말 진심이었기 때문에 

정신이고 뭐고 다 내려놓고 화를 냈던것 같다.

그 또한 사랑받기 위한, 사랑하기 위한 시도였고

지금 화를 내는 저 딸의 모습에서 내가 보였다.


이 기억이 의미하는 건 성가시더라도 매 순간 진심으로 살아가자는 거다.

사랑하는 건,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사랑하자는 거다.

이와 중에도 냉면을 떠올리는 나만의 느낌을 소중히 하고 싶다.     

냉면에 진심인 사람은 바로 한인마트로 향했다.

냉면에 대한 오늘의 열망을 최대한 순수하게 그대로 유지하고 싶다.

집에 미리 사다 놓은 냉면이 아니라

오늘은 왠지 갓 사온 냉면을 먹어야겠다 생각했다.

여기서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만남, 들깨 메밀냉면과 만난다.

나는 이걸 처음 먹었을 때의 놀라움과 흥분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다.

들깨를 몰랐던 시절로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다.    

 

장항준 김은희 작가 집 가훈이

인생은 여름방학처럼 했다.


오마주 해서 우리집 가훈은

인생은 냉면먹는 여름방학처럼” 으로 정했다.

돌이켜 보니 냉면은 내 여름방학의 모티브였다.

냉면을 먹기 위해 수영을 했고

뜨거운 태양을 맞으며 맨발로 걸었다.

도저히 냉면을 사랑하지 않고는 살아갈 방도가 없는 여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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