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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차 Aug 03. 2021

하루키 루틴에서 출발한 괄호 루틴

자기만의 생태계

도서관에 도착해서야 알았다.

노트북을 두고 왔다는 걸.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부탁을 한다.

어릴 때 비슷한 기억이 떠올라서

갑자기 피식 웃음이 났다.

그런 기억들을 잊지 말고 살아가라는 신의 장난 같았다.   

  

초딩 때 아빠 차에서 내려 교실에 도착했는데

책가방을 안 가지고 왔었다.

분명 당황했지만 요상하게 싫지 않았다.

내가 실수를 하더라도 도와줄 사람이 있다는 안도감.

그 당시 아빠가 내 책가방을 가지고 다시 학교로 왔다.

아빠도 그런 내가 어이없었는지 놀려대며 웃었다.

똑같은 표정으로 남편이 나를 보고 웃고 있는데

비슷한 웃음, 다른 느낌이다.

그는 마스크를 쓰고 있다.     


마스크가 너무 익숙해져서 종종 잊고 산다.

언제까지 우리는 마스크를 쓰게 될까?

이대로 가다간 마스크를 쓰는 게

팬티 입듯이 당연한 게 되는 걸까?

사람들의 얼굴도 변하겠지?

웃을 때 입을 보지 못하니까

귀가 움직인다거나 빨개진다거나

그렇게 진화하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도서관으로 들어왔다.


노트북을 안 가지고 온 걸 알았을 때 잠시 멈칫했다.

그런 김에 그냥 오늘은 다운타운에 놀러나 갈까? 했다.

그런데 내가 요즘 하고 있는 루틴을 깨는 게 두려웠다.

    

새벽 4시 기상

6시간 글쓰기

10킬로 달리기/1.5킬로 수영

9시 취침      


이게 무라카미 하루키가 글에 몰입하기 위해 수행한 루틴이다.

그가 영혼을 진동시키는 명필을 쓰는 것도 대단하지만

이 스케줄을 하루하루 해나간다는 게 근사하다.

꾸준히 반복하면서 몰입하는 즐거움이 궁금했다.

저건 간접체험이 절대로 안 되는 분야다.

내 몸을 직접 통과해야 만이 저 쾌감을 느낄 수 있다.

         

하루키 루틴은 워낙 유명했지만

이걸 진짜 고대로 따라 해 보는 유튜브를 보고 나도 한번 해보자 싶었다.     

새벽 4시 기상은 내겐 넘사벽 신의 영역이었다.

그대로 무작정 따라 하다간 골병 날 것 같고

그 뼈대를 리모델링해보았다.

글쓰기와 운동이 가장 중요한 하루키 루틴을 레퍼런스 삼아

나만의 루틴이 만들어졌다.

  

하루키는 이 루틴을 해나가는 것에 대한 보상을

자신의 작업을 해나가면서 받았을 거다.

독자들의 분명한 감촉이 그를 앞으로 나아가게 했을 거다.

그런데 나는? 아직 아무런 보상이 없다.

티가 나야 흥이 나는 사람인데 전혀 즐겁지 않았다.     

갑자기 엄마의 달력이 떠올랐다.

엄마는 달력에 동그라미 세모 가위표를 해서

자신의 하루를 점검했었다.

단순했지만 매일 꾸준히 쌓아 올린 사람의 위력은 대단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몇십 년의 긴 세월 동안

루틴의 천재로 살아온 사람을 몰라봤다.   

  

처음엔 엄마의 아날로그 방식을 해보다가 최적의 앱을 발견하게 됐다.

내가 루틴을 지킨 것에 대한 결과를

핸드폰으로 볼 수 있게 시각화했다.

이걸 하지 않았을 때와 했을 때의 차이는 극명히 달랐다.

조금 성과가 미비했던 날에도

하기 싫은 마음을 껴안은 채 결국 완료했다는 표시를 할 때  뿌듯했다.     

나의 작은 노력들이 모여서

공중으로 흩어지는 게 아니라

분명히 여기에 있다는 증거가

내겐 절실했다.


자기만의 루틴이 있으면 어디에 있든

자기만의 생태계가 생긴다.

하루키도 인생에서 다양한 도시로 이주하며 살았지만

자기만의 루틴이 있었기에 글 쓰는 자신을 지킬 수 있었다.

루틴이 있으면 주어진 24시간이 진짜 내 것이 되고

하루를 장악하게 된다.

지금처럼 불확실하고 불안한 팬데믹 시대야 말로

우리에겐 자기만의 루틴이 필요하고

그 루틴이 우리를 구원한다.

  

자기 전 루틴 앱을 보면서 완성도를 체크한다.

하루를 정리하다 보면

신기하게도 여기 루틴엔 없는 전혀 다른 일들이 기억에 남았다.     

뜨개질하는 다이빙 선수의 사진을 스크랩하며

마음의 고요를 얻는 일이 라던지

오디오북으로 들은 맨발로 걷기를

진짜 공원에 나가 해보는 일 같이 사소한 것이다.      

생애 처음 맨발로 땅을 더듬으며 걸었다.

암을 치료하는 효과가 있다는 사실보다

내가 지구에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뭉클했다.

어떤 날은 60초 세안이 좋다길래

따라해 보기도 했다.

이 사소한 즐거움 덕분에 그다음 날의 루틴도 해나갈 수 있었다.

그 순간 나의 새로운 루틴이 만들어졌다.

괄호라는 것만 있고 그 안은 매일 새롭게 채우는 거다.

그래서 나는 루틴 어플에 ‘(    )’를 추가하고 그걸 괄호 루틴이라 부른다.     

괄호 루틴은 모든 것이 가능하다.

애플 크럼블 굽기에 망하는 것

레스토랑에서 새치기당하는 것도 가능하다.

어제는 몰랐던 걸 오늘 해보는 것

어제는 보이지 않았던 게 오늘 눈에 들어오는 것

아침에는 이 괄호가 무엇으로 채워질지 전혀 몰랐다가

자기 전에 알게 되는 것

별것 아닌 작은 게 모든 것을 바꾸게 되는 것


다른 루틴이 가끔 무너질지라도

괄호 루틴은 죽을 때까지 유지하고 싶다.          

맥락없는 이벤트가 새로운 루틴을 만들어 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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