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력 결핍쟁이와 살아가는 법
영어 공부를 위해 유튜브를 켠다.
“(혼잣말) 이거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거야.”
“죽을 때까지.”
“어떻게 그걸 알아?”
“나도 마찬가지니까.”
오늘 아침이었다.
어젯밤, 양치 안 하고 자려는 한심한 인간이
아침에는 저런 근사한 말을 한다.
’ 나도 마찬가지니까 ‘라는 말은 요상하게 위로가 된다.
나는 ’ 영어는 뭉개서 발음하는 거‘라는 걸
이제 겨우 알게 된 새내기 이방인이다.
이방인 선배인 남편은 미국에서 30년 넘게 살았지만
영어는 죽을 때 까지라고 말한다.
최근에 나는 그의 ’ 극단적 모순‘에 꽂혀있다.
정리 정돈 청결의 일인자께서 어째서
자기 전에 양치질하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의 행동을 보고 있으면 자꾸 물음표가 늘어난다.
얼마 전 무심코 유튜브를 보는데
남편이 ‘성인 ADHD 아닐까 ’하고 의심되었다.
(*주의력 결핍 과다행동장애)
내가 이야기하는 도중에
그는 맥락 없이 막 치고 들어 올 때가 자주 있다.
우리의 이야기가 한없이 엉뚱해지는 이유다.
물건을 자주 잃어버리고
담배를 못 끊는 건 너무 확실한 증거였다.
얼마 전 장 보다가 핸드폰을 잃어버렸는데
핸드폰을 잃어버린 사실보다
바로 달려가 새 핸드폰을 사는 빠르기에 놀랐다.
핸드폰, 지갑을 자주 잃어버리는 데
그는 그걸 이미 삶의 일부로 여기고 있었다.
뒤돌아보니 나는 주의력 결핍의 끝판왕과 살고 있었던 거다.
병원에 데려가서 검사를 받고 치료를 받게 할까 잠시 생각했다.
그런데 나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이런 요상한 남편이랑 사는 재미가 없어지면
나는 무슨 재미로 살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것보다 이게 부부관계의 불화를 가져온다는데
나에겐 오히려 재미를 가져다줬다.
남편의 몸 안에 여러 명의 영혼이 살고 있는 것 같다.
한 영혼이 누군가의 몸을 빌려야 하는데
공유 주택처럼 가성비 좋아하는 영혼들이 남편의 몸에 합숙하듯 들어앉은 거다.
나 역시 여러 명과 사는 느낌이다.
그런 묘미에 놀아나고 있는 나는 그 영혼들의 방대한스펙트럼에 자주 놀란다.
“그런데 책 같은 건 꼭 힘들게 써야 하는 거야?
그런 거 안 쓰고 내가 읽고 싶은 책 실컷 보는 게 더 좋지 않아?”
그 누구도 내게 그딴 걸 물어보는 사람은 없었다.
나를 포함한 내 주변인 들은 책을 쓰고 싶어 안달 난 인간이기에
너무 당연하게 모두가 책을 내고 싶어 하는 줄 알았다.
어떻게 저런 신선한 말을 하지?
그말은 도끼처럼 나를 깨뜨렸다.
나도 나를 붙들고 소상히 물어본 적은 없었다.
나는 왜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걸까?
쓰고 싶다는 욕망 밑에는 뭐가 있을까?
막연히 글을 통해 쌓는 우정이나 연대감을 좋아했다.
첫 책을 내고 내 글이 누군가에게 가 닿는다는 실감이 소중했다.
왜 책을 써야 하는지에 대한 두루뭉술한 답 말고
뾰족한 답을 생각해봤다.
그러면서 남편의 저 질문이 내가 일생을 두고 가져갈 질문이 되었다.
얼마 전 읽은 <루이스 부르주아> 인터뷰에서
‘성공이란 자기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이라는 문장이
나를 매료시켰다.
성시경이 유승준과 관련해 ’ 국가가 입국 금지시킨 건 유치하다 ‘고 말한 것처럼
나도 내 소신을 말하고 싶다.
예를 들면 김연경 선수의 경기에 왜 마지막 올림픽 경기라고
함부로 붙이는 건지 모르겠다.
마지막? 그거 누가 정한 거지?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어디 없나?
마지막이 될 가능성은 높지만 마지막이 된 건 아니다.
출전 선수들의 나이는 과거 데이터일 뿐이다.
나는 이런 이야기들을 하고 싶은 거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고! 이런 생각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고!
그래서 나는 오늘도 지금도 쓰고 있다.
나의 요상한 이방인 선배는 나를 도서관에 내려주고
’왜 책 같은 걸 쓰려하는지 전혀 모르겠다 ‘는 표정으로
낮잠을 자러 갔다.
어쩜 저렇게 신생아 처럼 낮잠을 챙겨 자는지
신기한건 나도 마찬가지다.
어머나 세상에 이런 인간도 다 있네? 느낌으로
가까이서 서로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한 게 결혼 생활의 묘미라 생각한다.
그 재미의 균형을 위해
재빨리 글을 쓰고
낮잠을 맛있게 자고 있는 인간을 괴롭히러
지금 달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