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체적 난국엔 공원으로 간다

우리들의 베이스 캠프

by 보리차

언제든 야간 도주가 가능한 상태!

그게 내가 바라는 인생이다.

포틀랜드도 마찬가지다.

언제 내가 여길 떠나게 될지 모르니까 라는

심정으로 살고 싶다.


원래 이렇게 오랫동안 방송작가를 할 생각은 없었다.

오랫동안 그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건

“언제 은퇴할 거야?”라는 엄마의 말 때문이었던 것 같다.

엄마는 딸이 직업을 가지기보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기 원했다.

보통 옛날 사람들의 보통 생각이다.

그 저항감이 나를 이끌었다.

반대세력이 생기면 가만히 있던 힘도 커지는 것 같다.


나는 집돌이인 남편을 끌고 매주 공원에 간다.

내가 자꾸 본능적으로 공원에 가려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오늘 든 생각은

포틀랜드 뽕을 뽑으러 가는 것 같다.

적어도 나중에 “난 실컷 공원을 다녔어.

공원에 널린 보약 같은 거 내가 다 쪽쪽 빨아먹고 와서

여한이 없어, 그 추억으로 살아갈 거야”

이럴 수 있을 거 같아서다.

내게 무슨 일이 생길지는 몰라

미리 공원을 저축해 두는 거다.

케렌시아는 스페인어로 피난처, 안식처를 뜻한다.

투우 경기장에서 투우사와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소가 숨을 고르며 잠시 쉬는 곳이다.

최근에는 바쁜 일상에 지친 현대인이

나만의 휴식처를 찾는 현상으로 불리고 있다.

나는 이걸 비빌 언덕이라 부르고 싶다.

사람에 따라 그곳은 차 안이나 카페, 골프장 등 다양한 곳이 될 수 있는데

나에게는 정말 언덕이 있는 공원이다.


인구 대비 맥주집이 가장 많은 포틀랜드는 공원도 많다.

내가 지금 있는 공원에서 걸어서 근처 공원으로 갈 수 있을 정도로 공원 부자다.

공원에서는 자연스레 SNS를 끄게 된다.

뛰어노는 강아지를 멍 때리며 보거나

기타를 치며 깔깔거리는 무리를 구경한다.

공원에선 평소엔 생각조차 하지 않는 기분과 감정이 생겨난다.

내 발로 직접 땅을 훑고 지나갈 때, 중력이 날 잡아당기듯이

내가 무엇을 잡아당기고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결심, 다짐, 시작 모든 것은 공원에서 시작되었다.


공원에 와서 뿌러뜨릴 것들을 해결하기도 한다.

요즘 나의 큰 고민은 남편의 나태함이다.

운동도 한 달째 안 가고 집에서 빈둥거리는 꼴을 도저히 못 보겠다.

부부는 같은 포인트에서 웃고 분노하고

세계관이 같아야 한다고 장항준 감독이 그랬다.

그런데 나는 그 세계관이 같기 전에

욕망의 크기부터가 맞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눈에는 나태함이지만 남편에게는 평안한 일상이니까

갈등이 생기는 거다.


점심시간까지 꿀잠을 자고

하루하루 자기의 방구 소리 크기에 감격하는 사람

그게 인생의 기쁨인 사람이랑 앞으로 계속 살 수 있을까?

가끔 그가 정글북에서 튀어나온 야생소년 같기도 하다. 도저히 21세기 자본주의를 사는 인간 같지 않다.

그런 안빈낙도 인생을 가까이서 보고 있자니

하루하루 시간을 알뜰하게 써야 직성이 풀리는 나는

화가 치밀어 오른다.

한 명은 평온한데 한 명은 천불이 나고 있다.


그런 내가 남편 눈에는 병적으로 이상해 보일 거다.

계속 목표를 세우고 하루의 스케줄을 시간별로 짜고

무언가를 열심히 하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상태가 괴상해 보일 거다.

하루를 알뜰하게 써야 잘살고 있는 것 같다.

너무 다른 환경에서 살아와서 각자의 속도가 다른 걸까?

오늘은 이 총체적 난국의 문제를 뿌리 뽑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결혼생활 이대로 괜찮은가를 심각하게 고민하려는 찰나

아름다운 노을을 보니 아무 생각 없이 풀어진다.

오늘, 지금, 여기가 아니면 볼 수 없는 즉흥적인 예술작품!

이 놀랍고 경이로운 걸 보고 있으니까

지금 본 이 노을을 생각하면 무슨 일이 닥쳐도 이겨낼 것만 같다.

이 거대한 자연이 들려주는 말 ‘오늘의 선물을 받아라’ 앞에서

운동을 빠지지 말고 가라, 일찍 일어나라, 내일부턴 새사람 좀 되자! 이런 말들이 너무 짜쳐 보인다.

지금 눈 앞에서 벌어지는 생애 몇번 안될

고귀함을 두고 그런 말을 꺼내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다.


무슨 큰일이라도 난 듯 중요 대책을 세워야겠다고 전전긍긍했는데

공원에 와서 나의 큰 고민은 작은 고민이 되고

돌아올 때는 부서져 사라졌다.

포틀랜드에는 공원이 많아서 정신과가 망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공원에서 나오는 길

남편은 나보다 앞서 뛰어가 차를 뺀다.

내가 차 타기 편한 위치에서

날 기다리는 남편을 보고 다시 생각한다.

난 방금 본 경이로운 장면의 감동이 식지 않았는데

아니 식을까 동동 거리며 간직하려는데

‘이건 매일 밥먹듯이 그냥 있는 일이야’처럼

남편은 무덤덤하다.

디폴트인 것에선 감동 받기 어려우니까.

그게 맞다면 나는 영원히 이방인이고 싶다.

별것 아닌것에 좋아서 소리지르고

동동거리는 감각을 잃기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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