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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바람 Apr 12. 2018

03. 그 눈빛이 다 했다!

준영이가 처음 치료를 시작했을 즈음, 순하고 멀쩡한 아이를 이상하게 생각한다고, 남들이 나를 예민하고 극성맞은 엄마로 여길 때 다른 집 아이들과 어딘가 묘하게 다르다고 느꼈던 건 바로 ‘눈빛’이었다.


엄마를 바라보는 건지, 허공을 응시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멍한 눈빛은 나를 너무 외롭게 했다. 우리는 흔히 명배우의 연기를 볼 때면 눈빛이 다 했다고 말한다. 그만큼 눈빛에는 사람의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화려한 말솜씨나 과장된 표정으로 마음을 포장할 수는 있어도 눈빛을 감출 순 없다.


아이의 눈빛에서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모아애착, ABA(행동수정치료), 언어치료, 놀이치료, 감각통합치료, 미술치료, 음악치료, 특수체육, 시지각 치료, 청지각 치료 (토마티스, 베라르), 고압산소치료, 한약, 영양제 요법, 아이스 스케이트, 수영까지 최근 유행한다는 동종요법을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의 치료를 받았다.


치료를 받아서인지, 시간이 흘러서인지 모방이나 운동능력은 조금씩 좋아지기는 했지만 일반 아이들과의 발달격차는 점점 커져만 갔고 아이는 점점 치료실 가기를 싫어했다. 아이의 우는 소리가 대기실까지 울려 퍼질 때면 이래서 아이가 좋아지기는 하는 걸까 이게 맞는 방법일까 고민하면서도 치료의 끈을 놓기는 어려웠다. 혹시라도 치료를 하지 않으면 내 아이의 시간만 멈춰있을 것 같은 두려운 마음에 늘 새로운 치료 정보에 목말라했다.


회사를 휴직하고 본격적으로 치료 전선에 뛰어들었을 때만 해도 최선을 다하면 극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장애와 병이 무엇이 다른지, 장애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노력하면 된다고 어린아이를 데리고 내달렸다. 그렇게 숨 가쁜 1년을 보내던 어느 날 아이의 얼굴을 보았다. 남들은 순하다고 말하는 그 생기 없는 눈빛.


 넌 지금 행복하니



감정 없는 아이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 내가 지난 시간 무엇을 했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먹먹해졌다. 돈은 물쓰듯 쏟아부었고, 초보 운전으로 동네방네 다니다 보니 차는 돌려 깎기가 되어있었으며 촘촘하게 짜인 치료 스케줄에 나와 아이의 몸과 마음은 완전히 지쳐있었다.

우리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 일단 여기서 멈춰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만 질주하던 마음을 내려놓고 아이의 행복을 위해 새로운 길을 찾기 시작했다.


자신의 생각을 말로 표현하지 못하니 아이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길을 찾는 건 무척 어려웠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아이의 다름이 배려받는 환경에 놓이는 것’이라 생각했다. 억지로 발화를 이끌어내고 관심도 없는 놀이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실컷 할 수 있고, 하기 싫은 것은 하지 않아도 되는 '스스로의 의지'가 존중되는 곳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고민 끝에 선택한 곳은 종일 숲에서 뛰어놀고 흙 강아지가 되어 집에 돌아온다는 장애통합 숲어린이집이었다.

어린이집에서 활동하는 시간을 훨씬 늘리고 주말에도 산으로 바다로 놀러 다니다 보니 당연히 치료시간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고 아이의 언어 표현이나 인지능력은 여전히 정체기였는데, 전과 달리 나는 점점 편안해졌다. 아이의 눈빛이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반짝거리는 날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인형처럼 가만히 앉아 눈만 껌벅거리고, 서랍장 한번 열어본 적이 없던 준영이는 책장을 정글짐삼아 올라가고, 온갖 잡동사니를 꺼내와 노는 생기발랄한 아이가 되었다.  

어느덧, 산만해진 아이를 따라다니며 잔소리를 늘어놓는 횟수가 많아졌지만 아이다움이 살아있는 지금은 벽 앞에 서 있는 것처럼 외롭지는 않다.

 

성장주의 관점으로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살아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며, 하기 싫어도 참고 견디는 것을 미덕으로 배워왔던 나는 아이 덕분에 많이 달라졌다.  지금 이 순간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남들과 다름을 존중받는 온전한 이해와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달아가고 있다.


여전히 말을 잘 못하고, 사회성도 부족하니 결과중심적인 전문가가 보기에는 낭비된 시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아이의 눈빛이 말하고 있다.  


세상이 조금 신기하고 재미있어졌다고.

장난기 가득한 눈빛, 그거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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