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태어났을 때 나는 우리 아들이 자유롭고 창의적인 아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공부를 못해도 친구를 사랑하고, 사람을 좋아하고, 해맑은 사람으로 자라기를. 그래서 엉뚱한 행동으로 저지레를 많이 하고 내 속을 썩일지라도 "아휴 내가 정말 쟤 때문에 못 살아" 라는 말이 농담반.진담반.칭찬반으로 적절하게 나오는 말썽쟁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40대 중반이 된 지금까지도 숙제나 해야 할 일을 미룬 적이 거의 없다. 지금도 할 일을 안 하고 잠들면 알람을 맞추지 않아도 새벽에 무조건 깨는 예민함을 가지고 있다. 성인이 된 이후에 돌아보니 너무 애쓰면서 살았던 것 같아서... '아이다운' 추억이 별로 없는 것 같아서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최선을 다해야만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 오래된 불안이 내내 불편했다. 그래서 내 아들은 자유로운 영혼으로 키워야지, 예술가가 되어도 좋고 뭐가 되든 자기 삶을 사랑하고 성실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중학교 입학을 미루고) 나도 조기은퇴를 하고 남편, 아이와 함께 배낭을 메고 세계여행을 떠나는 것을 인생 버킷리스트로 계획했다.
캐나다 옐로나이프에 가서 나란히 누워 오로라를 보면 하늘이 춤을 추며 내게 말을 거는 것처럼 느껴질까? 29살에 혼자 갔던 방콕에서 셋이 맛있는 음식 골고루 시켜서 식탐을 부려볼까? 여행을 하는 동안 힘들고, 지치고 때로는 아파서 쉬었다 가야 하는 날도 있겠지만 매일 오늘을 추억하고 내일을 고민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특별한 경험을 함께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이는 4살이 되는 해에 중증 자폐 진단을 받았다. TV나 영화에서만 봤지 그때까지 실제로 내가 자폐인을 직접 만나본 적이 있었던가? 초보엄마에게 그냥 육아도 버거운데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장애진단을 받고, 새벽부터 도시락을 싸서 치료실투어, 병원투어로 정신이 없었고, 고요한 밤이 되면 인터넷으로 아이치료에 대한 정보를 찾아 헤맸다. 두렵고 무서웠다.
자신이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제대로 인지도 못하는 아이를 데리고 치료실을 다니다가 문득 버킷리스트가 생각났다.
함께 세상을 탐험하며 느끼고 싶었던 것들- 자연이 주는 위대함, 타인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다양한 삶의 방식에 대한 경험. 가족 세계여행은 포기해야 하는 꿈일까?
하지만 인생의 목표로 세운 우리의 꿈은 여정이지. 결과가 아니다.
어느 지점에 다다라서 짠하고 이루어내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한 걸음씩 움직이는 그 과정이 꿈을 이루어가는 여정이라면 꼭 어느 날 갑자기 배낭을 메고 세계여행을 하겠어! 하고 전투적으로 나아가지 않아도 되겠다. 수면장애가 있고 아직 한국말도 잘 못하는 아이지만 한 나라씩 천천히 머물며 오롯이 그 나라를 느끼고 돌아오는 여행을 해보자.
아주 천천히 즐기는 세계여행을 지금부터 떠나자
물론 배낭 메고 여행을 떠나야 비용의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지만 언제 우리에게 그런 꿈같은 시간이 주어질지 모르니 지금부터 기회가 될 때마다 천천히 여행을 즐겨보기로 했다.배낭 대신 캐리어 끌고 떠나는 세계여행을 시작해 보자!
장애가 있는 아이를 키우면서 열심히 맞벌이를 해서 비용을 마련하고, 시간을 아껴 부지런히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이제 14살이 된 아이는 홍콩을 시작으로 괌, 다낭, 보라카이, 코타키나발루, 세부, 마카오, 보홀, 치앙마이, 방콕, 파타야, 하노이를 다녀왔다. 국내에도 좋은 곳이 너무 많아서 방방곡곡 여행도 자주 다니고 등산도 틈틈이 다니면서 체력을 키우고 있다.
여행도 인생도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니까......
요즘은 비행기, 배, 트라이씨클 타는 것을 너무 좋아해서 매일 비행기 탈까? 라며 여행 가고 싶다는 말을 한다, 이제 6시간 정도의 비행은 무리 없이 (다른 승객분들에게 소음이나 피해 없이 지루해하지 않고) 다닐 수 있다. 기내 화장실도 혼자서 잘 들어갈 수 있고 기내식도 잘 먹으니 6시간 이상도 탈 수 있을 텐데 떠날 때마다 비행시간을 조금씩 늘리거나 해외 국내선이나 배를 타고 이동하는 동선을 추가해 보면서 아이의 적응력을 높여가고 있다.
우리의 꿈은 현재 진행형이고, 이제 더 멀리 나아갈 예정이다.
더 멀리 떠나기 위해서 지금까지의 여행 기록을 정리하고 스스로에게 동기부여를 해보고 싶다. 장애는 무엇인가를 해나가는 데에 불편함이 있거나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것이지 못하는 게 아니니까.
더 충분한 기회와 시간이 주어진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을 아이에게 알려주고 싶다. 꿈을 향해 가는 방식은 다양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