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되고 싶었어

첫 만남

by 이민서

스물일곱 살 결혼, 아이 세명을 낳고 싶은 꿈

20대의 나는 스물일곱 살 즈음 결혼해서 아이를 세 명은 낳고 싶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포스터를 보며 자랐고, 오빠, 언니들이 조카들을 두 명씩 낳아 기르는 것을 보면서도 ‘나는 적어도 세 명은 낳을 거야’라는 당찬 포부를 가지고 있었으니 어디에서 오는 자신감이었을까. 어릴 때 5남매가 작은 집에서 복닥거리며 살았던 추억이 내 마음속에 크게 자리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의 꿈은 결혼 나이부터 빗나갔다. 나는 스물일곱 살이 아닌 서른일곱 살에 결혼을 했다. 친정에서는 나이가 많아서 출산을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많았다. 늦은 나이에 결혼을 하다 보니 피임 같은 건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세 명은 아니지만 한 명이라도 낳아 잘 키워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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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 없는 임신

그런데 생각보다 빨리 임신이 되어 신혼생활을 제대로 누리지도 못하고 엄마가 될 준비를 해야 했다. 결혼을 하고 한 달 보름 정도가 지났을 무렵, 직장 동료의 생일 겸 팀 회식을 하고 아침에 일어났는데 약간의 어지럼증과 속이 메슥거렸다. 숙취와는 전혀 다른 생경한 느낌에 휴가를 내고 임신테스트기를 사다 검사를 했다. 기기에 찍힌 선명한 두 개의 줄을 보며 ‘임신을 하면 어떤 기분일까 상상이라도 해보았으면 좋았을 걸’이라는 생각과 함께 나는 어리둥절했다. 결혼생활에 적응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너무 빨리 일어난 일이라 약간의 당황함과 신기함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이 순간이 나와 아이의 관계의 시작이었다.


임신 소식을 듣고 친정엄마는 물론 오빠, 언니들도 무척 기뻐했다. 우리 집안에서는 막둥이가 태어나게 되는 셈이었다. 하지만 회사에서의 상황은 조금 달랐다. 결혼을 하면서 임원으로부터 ‘바로 임신하는 거 아니지?’라는 말을 이미 들었던 터였다. 그 시절만 해도 임신한 직원은 어찌 되었든 업무에 지장을 초래하는 사람이라는 인상이 강했고 업무 공백기를 가져야 한다는 이유로 민폐를 끼치는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업무 때문에 누군가에게는 달갑지 않은 생명이 된다는 것을 참을 수 없는 일이기에 업무에 오점을 남기지 않기 위해 나는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출산 전날까지 업무를 하며

당시 내가 근무하던 사무실은 별관에 속한 한옥이었다. 대문을 들어서면 가운데 중정이 있는 ㄱ자 한옥이 업무 분위기를 저절로 돋우는 사무실. 사람들의 왕래도 없고 PR과 사보 제작을 하는 직원들 7명이 오붓하게 근무하는 공간이었다.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회사 주변을 산책하는 시간은 아기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나는 아기에게 사람을 중하게 생각하는 따뜻한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한 가지 바람이 있었고 모두가 노산이라 칭하기에 아기가 건강하기만을 기도했다. 그래서 특별히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거나 ‘이러저러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거보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나의 생활을 아이에게 건네며 업무에 집중하는 것이 태교였다. 업무 자체가 부모들을 인터뷰하며 부모로서의 자질과 교육방법을 현장에서 배우는 것이었으니 태교로서는 안성맞춤이었다.


자연분만 No, 제왕절개

임신 4개월 즈음 배가 뭉치고 아파서 휴가를 하루 냈던 거 말고는 크게 불편함을 모르고 지냈다. 입덧도 심하지 않았고 라마즈 호흡법을 배우러 부부동반으로 일주일에 한 번 병원에 다니며 8개월을 보내는 사이 손가락으로 배를 천천히 간질이는 수준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던 녀석은 날이 갈수록 발길질도 하고 막달에 가서는 똑바로 앉은 자세로 고집을 피워 끝내 수술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열심히 배웠던 라마즈 호흡법은 수포가 되고 말았다. 배가 하루아침에 불쑥 나오는 게 아니라 서서히 불러오기에 특별히 배가 불러 힘든 점도 느끼지 못하며 출산일을 맞이했다. 담당의사는 어차피 수술을 해야 하니 좋은 날을 받아오라는 말했지만 나는 그냥 원래 예정일에 수술을 받기로 했다.


출산일을 두어 달 앞두고서 업무가 바뀌었다. 회사의 역사를 정리하는 사사 제작을 하는 프로젝트 업무를 맡게 되었다. 배부른 몸으로 취재를 다녀야 하는 업무는 아니었으나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일은 힘을 써야 할 때가 많았다. 출산을 2일 앞두고 마지막 출근을 해서도 자료 박스를 들고 다닐 만큼 나는 건강했다. 금요일까지 출근을 하고 토요일 하루를 집에서 쉬고 일요일 오후 병원에 입원했다. 난생처음 아이를 낳는 건데 병원에 입원하는 경험도 처음이었다. 휠체어에 앉아 수술실로 향하는 마음은 복잡했다. ‘아이가 건강해야 할 텐데’라는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지만 왠지 모를 불안감이 올라왔다. 노산이라서 기형아 검사를 받아야 한다는 의사의 말을 거절하고 지켜온 아이여서 더 불안했던 터였다. 그것도 잠시 ‘마취 시작합니다.’라는 말과 함께 나의 기억은 금세 가뭇해졌다.


손가락 발가락을 확인하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나는 내 인생을 스쳐간 사람들을 몽롱한 상태로 만나며 마취에서 깨어났다. 회복실로 옮겨지고 아이를 처음 본 만난 순간, 눈은 일자로 감겨있었으나 너무 예뻤다. 눈을 뜬 아기의 얼굴은 불그스름하기는 했지만 신생아답지 않게 동글동글하면서 노란 듯 갈색 머리카락 하며 어느 한구석 예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제일 먼저 내가 한 일은 손가락 발가락을 살펴보는 거였다. 기형아 검사를 받으라는 의사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인지 임신 말기에 아기 손가락이 폴더 휴대폰 사이에 눌리는 꿈을 꾸기도 했다. 혹시나 하는 불안감이 있어서 아기의 손과 발에 다섯 개의 손가락 발가락을 만져보며 안도했다.


'엄마'라는 말이 나오지 않아

키도 몸무게도 평균에 미치지 못했지만 아기의 손과 발은 오동통하고 컸다. 부드럽고 연약한 아기의 살결에 눈물이 났다.

“아가, 반가워! 우리 아기 참 예쁘다. 내가 엄마야”라고 첫인사를 나누려는데 이상하게 ‘엄마’라는 말이 목에 걸려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나는 당황했다. ‘뱃속에 있는 태아에게 수없이 되뇌었던 엄마라는 말이 처음 대면하는 우리 아기에게 나오질 않다니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나는 속으로 ‘엄마’라는 짧은 단어를 여러 번 되풀이하고 나서야 “아가, 엄마야!”라는 말을 할 수 있었다. 요즘처럼 3D로 태아의 얼굴을 볼 수 있었던 게 아니라 상상만으로 그리던 아기의 얼굴을 처음 봐서 생경했던 것일까. 아니면 자연분만의 산고를 느끼지 않고 마취에서 깨어나니 아기가 세상에 나와 있어서였을까. 그것도 아니면 나에게는 모성이라는 게 없는 것인가. 나는 순간적으로 여러 가지 생각에 마음이 복잡했다. 오물거리는 입, 감겨 있는 눈, 얼굴에 비벼대는 손. 꼼지락거리는 아기의 모습에 ‘내가 이 아기의 엄마인가’라는 생각에 잠시 멍했다. 한편 ‘내가 이 아기를 책임져야 하는 사람, 엄마다’라는 생각들에 미묘한 감정이 나를 압도했다. 만지면 부서질 것만 같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는, 아직은 무력한 한 생명 앞에서 나는 신비스러움과 막막함의 언저리를 맴돌았다.

엄마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막연하게 엄마가 되고 싶었던 나. 그 막연한 만큼이나 처음 세상 밖으로 나온 아기와 어정쩡한 모습으로 대면하게 했고, 서툴기만 한 나의 엄마 역할은 그렇게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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