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유 수유의 신화

모유 수유가 모성이는 착각

by 이민서

내가 출산을 위해 입원해 있던 병실은 2인실 이었다. 간호사가 들어와 옆 침대의 산모에게 모유수유 방법을 알려주며 아이에게 첫 수유를 시도했다. “가슴이 이렇게 실하니 모유도 잘 나온다.”며 산모를 격려하는 간호사의 말에 나는 왠지 모를 열등감을 느꼈다. 간호사는 내게도 가슴마사지를 하며 유선에서 젖이 돌아야 잘 나온다며 가슴을 마사지하고 아이를 내 가슴에 안겨주었다. 아이와 내가 세상에서 진하게 첫 접촉을 하는 순간이었다. 모유는 찔끔 나오다가 말았고 간호사는 남편에게 가슴 마사지를 계속 해 주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하지만 옆 침대의 산모처럼 나는 모유가 잘 나오지 않았다. 가슴이 작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임신시기에 유선이 발달하도록 준비를 못한 탓도 있었다.

픽사베이

황달과 내성발톱

그러던 중 태어난 지 사흘 만에 아기는 황달로 입원을 했다. 아이에게 수유를 하지 못하게 되자 모유는 더 나오지 않았다. 통증 주사를 중단하자 수술 부위 통증은 심하고, 아기는 입원 중이니 모유에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면회시간을 이용해서 유리창 밖에서만 아기를 잠깐 볼 수 있었는데 조금만 아기가 하얀 전등 아래 누워 있는 모습을 보려니 마음이 아팠다. 어떻게 해줄 수 없는 안타까움과 안쓰러움은 말로 표현할 길이 없었다.

아기의 황달은 좋아지고, 나도 어느 정도 수술 통증으로부터 조금 회복되어 퇴원 날이 되었다. 일주일 만에 병원 밖으로 처음 나가는 아기의 외출에 철저히 준비를 하고 퇴원 수속을 하려는데 아기의 건강 문제로 담당의사 선생님의 면담이 있다고 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신생아에게 건강에 문제가 있다니. 가슴이 터질듯 쿵쾅거리고 머릿속이 하얘졌다. 내 심장소리를 들으며 의사와 마주 앉았다. 의사선생님은 아기의 발톱이 살을 파고드는 내향성 발톱으로 아기 엄지발가락에 염증이 생긴 상태니 연고를 발라주고 일주일 뒤 내원하라는 거였다. 그나마 다행이었으나 벌렁거리는 심장박동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아기가 불치병에 걸렸거나 큰 수술을 앞둔 부모의 심정은 오죽할까 싶었다.


퇴원을 해서 나와 아기가 간 곳은 우리 가족의 보금자리인 신혼집이었다. 내가 출산을 할 무렵부터 산후조리원이 한창 생겨나고 있었으나 나는 집에서 산후조리를 하기로 결정했다. 그 당시만 해도 산후조리원에 가는 산모보다는 시어머니나 친정엄마가 산후조리를 하는 편이 조금 우세한 편이었다. 나에게는 시어머니도 친정엄마도 사정이 여의치 않아 산후도움을 전문으로 하는 베이비시터를 2주간 집으로 오는 방법을 택했다. 베이비시터는 잘 훈련받은 베테랑으로 아기를 안고 씻기는 것부터 식사 준비는 물론 산후 전신마사지까지 척척 해냈다. 베이비시터의 야무진 마사지 손길을 한 동안 잊을 수 없었다.


턱없이 부족한 모유

베이비시터의 도움으로 나에게는 먹을거리도 육체적인 쉼도 충분했는데 문제는 아기의 먹을거리였다. 베이비시터가 가슴 마사지를 해줘도 모유는 잘 나오지 않았다. 워낙 양이 작아 젖병수유를 병행하고 있었지만 되도록 모유수유를 하고 싶었던 나는 유축기도 사용해 보았지만 여의치 않았다. 아기가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도록 힘을 다해 빨아도 배를 채울 수 없어 아기는 얼굴이 벌게지기만 하고 울었다. 갓난아기의 울음소리는 생각보다 컸고, 배가 고파 우는 소리는 너무 절박해서 마치 내 가슴을 쥐어짜는 듯했다. 안타까운 마음에 아기가 잘 때 유축기를 사용하여 조금이라도 모유를 준비해서 먹이고 싶었으나 모유의 양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2주 동안 모유를 먹이기 위해 씨름을 하다가 결국 분유를 먹일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모유 수유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나의 신념은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수술 상처가 아물지 않아 허리를 웅크리고 앉아서 수유를 해야 하는 고통은 사라졌지만 모유수유에 대한 미련은 한동안 내 마음에 남았다. 임신 중에 모유수유에 대해 준비를 하지 못했다는, 엄마로서 준비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자책감이 들었다.


무산된 모유 수유에 대한 동경

나에게는 젖먹이는 엄마에 대한 막연한 동경 같은 것이 있었다. 저고리 가슴을 풀어 헤치고 젖을 먹이는 엄마의 모습과 꼼지락거리는 손으로 가슴을 만지며 있는 힘껏 젖을 빠는 아기의 모습에서 묻어나는 정겨움과 사랑이랄까 그런 거 말이다. 또한 모유수유가 아기 건강은 물론 두뇌 발달에도 좋다는 정보가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당시 우리 사회는 모유수유의 중요성이 대대적으로 홍보되고 있는 시기였다. 산업화가 이루어지면서 여성들의 경제활동이 증가하고 모유수유 비율은 급격히 줄어들어, 2000년대 초 우리나라의 모유 수유율은 9.4%였다. 다양한 분유 광고와 우량아 선발대회 같은 TV프로그램으로 분유 광고를 하던 국가는 입장을 바꿔 ‘모유의 우수성과 필요성’에 대해 과학적으로 입증하며 홍보에 나섰다. 교육기업에 근무하던 나는 육아와 교육에 대해 나름대로 공부를 하며 영유아시기에 형성되는 애착의 중요성에 대해서 보고 들으며 모유수유를 애착형성 모델의 가장 좋은 예로 인식하고 있었다. 세계보건기구의 권장과 정부 각 기관들의 홍보 결과 2000년대 초 9.4퍼센트였던 우리나라 모유수유율은 2006년에 30.9퍼센트를 기록했다. 현재도 우리나라 모유 수유율은 완전모유수유는 아니지만 30퍼센트 대를 유지하고 있다. 나는 아이와 관계가 틀어질 때면 지금도 가끔씩 ‘모유수유를 못해서’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모유수유는 아이와의 관계에서 빙산의 일각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수입 분유 선택의 어처구니 없는 이유

100퍼센트 젖병수유로 전환하면서 우리 부부에게는 분유의 선택이라는 과제가 주어졌다. 아이가 평균보다 키와 몸무게가 약간 미달상태로 태어났기 때문에 남편과 나는 ‘키를 크게 한다.’는 제품을 찾아 나섰고, 남편은 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외국 제품의 분유를 선택했다. 품질 좋은 국산 제품이 생산되고 있음에도 오로지 ‘키가 큰다.’라는 입소문에 현혹되어 값비싼 수입 분유를 선택했다. 국산제품의 분유를 끝까지 고집하지 못하고 고가의 수입 분유를 선택한 데에는 평소 작은 키에 대한 나의 열등감이 묻어있었음을 고백한다. 거기에다 ‘모유수유에 실패한 엄마’라는 자책감을 ‘키가 큰 아이로 자라게 한다.’는 분유로 합리화가 필요했다. 달달한 분유를 아이는 잘 먹고 잘 자고, 배변 활동도 잘 하며 소시지를 연상시킬 정도로 팔에 줄줄이 선이 생기도록 통통하게 잘 자랐다.

baby-200760_640.jpg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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