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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서 Jun 15. 2024

사람 풍경

네 아버지는 참 좋은 사람이야

아버지의 자전거_픽사베이

팔순이 넘으신 고모는 통화를 할 때마다 말씀하신다. “네 아버지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어. 네 아버지 아는 사람 중에 네 아버지 욕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며 너무 일찍 돌아가셔서 억울하다는 말도 덧붙이신다. 언니들과 얘기를 하다보면 큰언니는 다정한 아버지로, 작은언니는 낭만적인 아버지로 경험담을 풀어놓는다. 그럼 나에게 아버지는? 나는 언니들에게 아버지는 짜증 많고, 아픈데 많고, 손 많이 가는 스타일이었다고 말하곤 했다. 언니들은 내 말을 듣고 믿을 수 없어 했고, “네가 아버지한테 제일 사랑 많이 받았는데 무슨 소리냐”고 핀잔 아닌 핀잔을 했다.      


내 기억의 어느 부분에서 잘못된 것일까. 내가 아버지를 기억하는 첫 장면은 무서운 아버지이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아버지는 농한기가 되면 길 건너 주막에서 술을 드시고, 화투, 윷놀이에 빠져 지내셨다.      

그날도 아버지는 거나하게 술에 취해 집으로 오고 계셨다. 우리 집은 길보다 지대가 높아서 일 미터 정도는 오르막을 올라야 마당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여섯 살의 나와 세 살 난 동생은 대문 앞에 서서 술에 취해 귀가하시는 아버지를 보고 있었다. 아버지의 두 손에는 커다란 돌이 들려있었고, 아버지는 술에 취한 탓인지 돌이 무거워서인지 휘청거리셨다. 지금 생각해도 마치 꿈속에서 일어난 일처럼 느껴진다. 나는 두려움에 얼어붙었다. 아버지는 우리를 보고 내려오라고 하셨지만, 겁에 질린 우리는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그때 아버지의 말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얼어붙은 우리를 보고 아버지는 “고슴도치도 자기 자식은 해치지 않는다. 걱정말고 내려와라.”라고. 그 이후 어떻게 일이 진행되었는지에 대한 기억은 없다. 다만 술에 취한, 돌을 든 아버지의 모습만 박제되었다.    

  

아버지는 지병이 많았다. 신장이 좋지 않았고, 관절통도 심했다. 어릴 때 아버지의 허리를 밟는 일은 내가 힘들어하던 일 중 하나다. 나이가 들면서 아버지는 신경질이 많았다. 농기구를 수리하다가도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는 버럭 화를 내셨고, 재떨이가 필요할 때도 한 걸음만 움직이면 될 일을 엄마에게 가져다 달라고 하셨다. 일일이 엄마의 손을 빌리는 아버지, 그것을 다 해 주시는 엄마가 내 눈에는 너무 고생스러워 보여 나는 예순이 넘은 엄마보고 이혼하라고 말할 정도였다.      


결혼이 늦었던 나는 엄마 아버지가 늙어가는 것을 옆에서 지켜봐야 했다. 30대의 나이에 늙어가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지 못했던 나. 어쩌다 집에 가면 짜증 내는 아버지 모습을 보게 되어 아버지가 싫었다. 여기저기 아픈 아버지, 엄마를 힘들게 하는 아버지, 나에게 짜증을 내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나에게 아버지는 그렇게 내 마음속에 저장되어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말하는 좋은 사람인 아버지, 다정하고 낭만적인 아버지를 찾고 싶었다. 내 기억의 한 부분만 보고 아버지를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되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가면서 나는 새로운 아버지를 만났다.      


사실 나는 자라면서 아버지에게 ‘계집애’라는 소리도 듣지 않았다. 우리 집 마루 처마 밑 선반에는 항상 무궁화 회초리가 준비되어 있었지만 한 번도 매를 맞아 보지 않았다. 나에게 회초리는 그저 훈육용으로 준비해 둔 장식품에 지나지 않았다.      


외출했다가 집에 오실 때면 아버지 손에는 항상 무엇인가가 들려있었다. 가끔씩 거나하게 술에 취해 오시면 우리 형제들을 깨워 일장 연설로 귀찮게 했지만, 마른오징어라도 꼭 사 들고 오셨다. 외출 후 집에 오시면 늘 세수대야에 물을 받아 발을 씻으셨던 아버지는 종아리 알을 왼쪽 오른쪽으로 보내며 “아버지 다리 없다, 어? 아버지 다리 여기 있네”라며 우리 형제들에게 웃음을 주셨다. “하늘에서 솜 백 근과 쇠 백 근이 떨어지면 뭐가 먼저 땅에 떨어지냐?”며 엉뚱한 수수께끼로 박장대소하게 만드셨다.    

  

초등학교 3학년 때로 기억한다. 늦여름의 어느 아침, 나는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러 가려고 신발을 신다가 신발 속에 들어있던 왕벌에 쏘여 걸음을 걸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2주일 동안 나를 자전거로 등하교 시켜주셨다. 초등학교 담 둘레에는 아름드리 플라타너스가 서 있고, 베이지색 점퍼에 초록색 새마을 모자를 쓴 아버지는 자전거 뒤에 나를 태우고 넓은 운동장을 가로질러 쌩쌩 달리셨다. 단발머리를 바람에 날리며 나는 아버지 등에 꼭 붙어 있었다.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 순간 모 기업의 광고처럼 아버지와 자전거가 동화 속의 한 장면처럼 내 마음으로 들어왔다.      


한 번은 마루에서 낮잠을 자다가 깨어나니 밤이었다. 아버지는 “우리 딸, 이제 일어났네.”라며 잠이 덜깨 어리둥절하고 있는 나에게 하늘을 보여주셨다. “별이 많이도 떴다. 밤하늘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별이 있다. 큰 별도 빛나지만 작은 별도 빛난단다. 우리 딸도 빛나는 별이 될 거야.”라고 말씀하셨다. 그때는 어려서 잘 몰랐다. 나만의 별로 빛나는 인생이 되라는 덕담임을.     

 

직장에 다닐 때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부모님이 사시는 집에 갔다. 공교롭게도 집에 갈 때마다 내 자동차는 더러웠다. 아버지는 “네 얼굴 화장은 하면서 자동차는 세수를 시켜주지 않았네.”라고 말씀하시며 수돗가에서 물을 퍼다 자동차 세차를 깨끗하게 해 주셨다. 직장생활을 하며 힘들어할 때는 “힘들면 직장을 쉬어도 된다. 언제라도 집에 와서 쉬어라.”라고 말씀해 주시던 아버지가 있었다.      


나에게도 아버지는 자상하고 낭만적이고 좋은 사람일 때가 많았다. 다만 내가 꺼내보지 않고 묻어둔, 부정적인 시각에 가려져 찾지 못한 아버지가 꼭꼭 숨어서 빛볼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호기심이 많아서 땅콩 농사짓는 법을 군 지역에 전파했고, 천 평 남짓한 우리 밭에는 해마다 농작물이 바뀌었다. 어떤 해에는 도라지꽃이 만발하고, 어떤 해에는 천도복숭아가 열리고, 어떤 해에는 구기자가 빨갛게 열렸다. 돌아가시기 전에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던 감천배를 심어 판매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아버지는 늘 뭔가 도전하는 삶을 멈추지 않으셨다.      


어린 시절의 부정적인 경험은 인지 왜곡을 불러온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아버지와의 관계를 돌아보게 되었다. 아버지는 떠나고 안 계신 데 뒤늦게 아버지께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 내 마음 편하기 위해 시작한 글쓰기를 통해 아버지를 다시 만났다. 아버지의 생애를 돌아보며 안타깝고 감사한 마음을 깨달았다. 풍수지탄이라고 했던가. 삐딱한 시선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던 나의 편협함을 느끼며 ‘덕분에’의 힘을  온몸과 마음으로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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