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민서 Jun 11. 2024

추억 풍경

꿈에 그리던 여고 입학, 좌절을 맛보다


담임선생님의 설득으로 우여곡절 끝에 대전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한 나. 나는 여고에 대한 환상이 컸다. 남녀 공학인 초·중학교를 다니면서 여고에 다니는 둘째 언니가 무척 부러웠었다. 남색 주름치마에 흰색 줄이 쳐진 세라복을 입고 통학버스를 타러 뛰어가는 언니는 한 마리 나비처럼 가볍고 예뻤다. 반면 나는 치렁한 플레어 치마를 입는 여름을 제외하면 봄가을겨울 내내 검정 바지를 입고 자전거를 타고 쌩쌩 바람을 가르며 등교했다. 여학생보다 남학생이 많았던 중학교를 벗어나 여고에 진학하는 설렘은 신세계로 나아가는 거나 다름없었다. 더구나 내가 살던 시골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대도시로 여겨졌던 대전에서 고등학교에 다니게 되다니.      

하지만 산 꼭대기에 위치한 학교는 질이 좋지 않기로 이름난, 후기에서 전기로 전환된지 2년째 된 학교였다. 학교 배정통지를 받고 며칠을 울었다. 교복도 나를 실망시켰다. 대전으로 진학한 여자애들은 열 명 남짓, 다른 친구들 교복은 허리에 벨트가 있어 날씬해 보이는 교복, 초록색에 타이를 매는 교복, 세련된 남색 교복을 입는 애들도 있었지만 우리 학교 교복은 회색으로 치마는 약간 플레어도 타이트도 아닌 어쩡쩡한 스타일이었다. 상의는 가슴에서부터 절개선이 들어가 가슴과 허리라인에 따라 맵시를 좌우하는 교복이었다. 학교에서 안내한 집에서 맞춤 교복을 사 입었으나 재단 탓인지 상의는 불편했고 모든 게 썩 맘에 들지 않았다.     


자취방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학교 근처에 외삼촌할아버지 댁이 있어 대전 지리를 전혀 모르는 우리는 할머니께서 알선해 주신 방에 세 들어 살게 되었다. 주인집은 문방구를 운영했고 자취방은 문방구 옆문을 통해 들어가야 했다. 문을 들어서면 시멘트로 만들어진 구역에 수도가 있고, 수돗가를 지나 부엌 하나에 방 한 칸이 딸린 곳이 어닌와 나의 자취방이었다. 작은 창문 하나에 책상을 놓고 나니 언니와 내가 누울 수 있을 정도였다. 창을 열면 바로 큰길로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게 보였고, 길 건너 이층집에서 우리 방이 훤히 보일 거 같았다. 유리로 된 격자무늬의 미닫이문을 열면 두 개의 계단이 있고, 내려서면 연탄불 아궁이 하나에 작은 찬장과 곤로가 부엌살림의 전부였다.      


옆방에는 한 가족이 세 들어 살았다. 택시 운전을 하는 아저씨와 아줌마, 아홉 살 난 남자아이 세 명이 살았다. 택시 운전을 하는 아저씨는 술을 마시면 집안 살림을 부수고, 아줌마를 폭행했다. 아이는 맨발로 쫓겨나기 일쑤였고, 일주일에 두 세 번씩 치러지는 그들의 싸움 소리는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난리를 치르듯 폭풍이 지나고 난 이튿날이면 아줌마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부엌에서 밥을 하고 있었다. 참 이해할 수 없는 풍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기 초에 담임선생님이 가정 방문을 오셔서 창문틀에 대못을 한 개 박아주셨다. 밖에서 창문을 열 수 없도록 창문 옆 창틀에 못을 박아주신 것이다. 그런 데까지 신경을 써 주시는 선생님이 신기했다. 창문을 열어 놓고 있던 어느 주말, 평생을 잊히지 않는 광경을 목격했다. 언니는 낮잠을 자고 있었고 방바닥에서 뭔가를 하던 나는 목 언저리가 스멀스멀 벌레가 기어가는 듯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들어 창문을 보니 웬 남자학생 얼굴이 빼꼼히 보였다.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으나 그 남학생은 도망가는 게 아니라 마치 슬로우머신이라도 탄 듯 아주 느리게 밑으로 얼굴을 내리고 있었다. 나와 눈길이 마주쳤는데도 놀라기는커녕 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이다. 주인집 아저씨가 밖에 나가 소리를 치니 그제서야 남학생은 줄행랑을 쳤단다. 나도 모르게 누군가가 훔쳐보는 시선이 있다는 것 자체가 공표였다. 그 이후 창문을 열 수 없어 답답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담임선생님의 대못이 아니었으면 어땠을까. 온몸이 오싹해진다.  

    

그렇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정신없이 시간이 지나갔고, 드디어 중간고사. 매주 과제와 주간 평가가 있긴 했으나 그다지 긴장하지 않았던 나는 중간고사 성적을 받고 머릿속이 하얘졌다. 성적표에는 태어나서 처음 보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반 석차가 전체석차라고 해도 믿기지 않을 숫자였다. 60명 중 40등, 처음으로 부모님께 성적표를 보여드리지 못하고 도장을 몰래 찍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공부하는 방법을 몰랐고, 공부하는 시간도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중학교 때까지 수업 시간에 들었던 기억에만 의존해서 시험을 쳤던 습관은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숙제만 잘해가는 학생, 시간을 내서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몰랐던 학생이었다. 1학기 중간고사의 결과는 오랫동안 나를 주눅 들게 했고, 시험 공부를 해야 한다는 걸 그제야 알게 되었다. 성적은 하루아침에 오르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적응하며 2학년이 되었다.      


2학년 때 짝꿍은 서산이 집인 친구였다. 쉬는 시간에도 전 시간에 배운 내용을 중얼중얼 공부하는 그 친구가 정말 신기했다. 앞자리에는 조치원에서 기차를 타고 통학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에게 매일매일 기차에서 생긴 에피소드를 듣는 재미가 컸다. 뒷자리에는 만화를 잘 그리는 성악 하는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베르사유 장미』의 주인공 오스칼을 쓱쓱 멋지게 그렸고, 나도 자주 따라 그리곤 했다. 책과 한몸이 되어 있는 짝꿍, 만화같은 스토리를 재미있게 전하는 통학생, 음표에 문외한인 나에게 청음을 들려주던 음대지망생과 함께 했던 2학년은 만화책에도 빠졌지만 소설과 시도 많이 읽던 시절이었다.

      

문제는 국어 시간이었다. 국어 선생님은 머리카락이 운동선수처럼 짧고, 전체적으로 험악한 인상이었다. 진한 브라운색 얼굴빛에 조금 튀어나온 눈, 눈동자를 많이 굴려 불안해 보였고, 입술은 유난히 두꺼웠다. 국어 과목과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 비호감의 외모였는데 학교 내에 도는 소문은 외모보다 더 좋지 않았다. 야간 대학을 나오고 학교에 많은 돈을 내고 교사가 되었다, 실력은 형편없다, 성격이 괴팍하니 수업 시간에 매우 조심해야 한다는 소문은 국어 시간을 긴장상태로 만들었다. 선생님의 수업 방식은 참고서를 그대로 읽고 질문이 허용되지 않았다. 한 번은 앞자리에 앉은 친구가 무언가를 질문했고, 선생님은 그 친구를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갑자기 교실 뒤편으로 가더니 자루걸레를 가지고 와서 그 친구를 마구 때렸다. 우리 반 친구들은 경악했고, 그 친구는 이유도 모른 채 가해지는 폭력을 당했다. 학생들은 말리지도 못한 채 벌벌 떨며 그 상황을 지켜봐야 했다. 그 시절에 빈번하게 자행되던 폭력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은 그야말로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시간이었다.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남자 국어선생님, 2학년 때 국어선생님과는 정반대로 곱습곱슬한 머리카락과 반짝이는 눈동자를 가진 키가 작은 선생님이었다. 학교 앞에 있는 집으로 학생들이 찾아갈 정도로 학생들이 많이 따랐고 좋아했다. 선생님은 학력고사에서 학생들이 고득점을 받을 수 있게 가르친다는 소문이 자자했고, 교과서도 보지 않고 수업하는 모습이 멋있었다. 5월경 선생님은 학교재단과의 문제로 학교를 그만두셨다. 대학입시를 앞둔 고3인 우리들은 휘청거렸다. 아이들은 며칠 동안 울며 선생님 댁을 찾아갔지만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새로운 담임은 2학년 때 그 국어 선생님. 그날의 충격이 생생하게 남아있던 나는 선생님의 시선은 물론 얼굴을 마주하는 것도 싫어서 피해다녔다.      

  

한 학년을 친구들 덕분에 버틸 수 있었다. 센티멘탈한 짝꿍과 화장지에 시를 써서 주고받았고, 비오는 날에는 물웅덩이에 들어가 아이들처럼 텀벙거리며 놀기도 했다. 왼쪽 줄의 친구는 운동장 스탠드 계단에 앉아 자기와 친하게 지내지 않는다고 울었다. 학력고사 100일을 남겨놓고 기념한다고 야간 자습을 땡땡이치고 동시상영 영화관에서 영화를 봤다. 학력고사 점수가 좋지 않아 요즘 말로 인서울이 어려운 상황, 입시 상담을 해주는 담임선생님의 말을 듣지 않고 내 맘대로 지원서를 냈고, 결국 나는 대학입시에서 낙방했다. 당시에는 담임선생님이 너무 무섭고 징그럽고 싫어서 어떤 말도 듣고 싶지 않았다.      


전문대학에 진학하라는 언니에게 “너는 4년제 대학에 다니면서 왜 나보고 전문대에 가라고 하느냐”며 막말을 하고, 시골집으로 내려갔다. 부모님을 마주하는 게 죄송스러워 식사 시간도 피하며 방안에만 머물던 나에게 엄마는 재수를 하고 싶으면 하라고 하셨다. 뻔한 집안 형편에도 불구하고 나는 입시학원에 등록하고 재수생이 되었다. 대학에 다니는 외사촌 언니, 고등학교에 진학한 동생까지 방 한 칸에서 우리의 동거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때부터 내 성격이 바뀌었다. 활발하고 당당하고 주도적이던 성격에서 사람들 눈치를 보고 중요한 선택의 순간에 망설이고 회피하는 경향을 지니게 됐다. 지금 같으면 ‘대학에 떨어질 수도 있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당시에 나는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고, 친구들은 모두 대학생이라서 자존심이 상했고, 나보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더 좌절했던 나였다.          

이전 08화 추억 풍경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