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을 높여준 멘토 선생님
중학교 3학년, 매년 남학생반을 담당하시던 선생님이 여학생반인 우리 반 담임이 되었다. 동그란 얼굴에 눈은 크고 부리부리해서 약간 무서운 느낌, 그래서 그동안 남학생반 담임을 하셨던 걸까. 손은 또 얼마나 크던지 그 손으로 한 대 맞으면 회복되지 못할 거 같았다. 그래서일까 남학생들 사이에서도 엄하기로 소문난 선생님이었다.
외모나 소문과는 다르게 선생님에게는 여러 가지 반전 매력이 있었다. 담당 과목은 국어, 글씨는 정자체로 칠판 글씨도 흐트러짐 없이 정갈했고, 붓글씨 솜씨 또한 걸작이셨다. 웃는 모습은 인자함이 고스란히 드러났고, 선생님과 개인 면담을 마치고 난 후 아이들은 하나같이 담임 선생님을 좋아했고, 선생님께 관심을 표현하고자 갖은 방법을 썼다.
선생님 주위에는 늘 아이들이 있었다. 나 또한 담임선생님을 너무 좋아했지만 애써 표현하지 않았다. 전교 1등을 놓고 자리 다툼하는 반장이 있었고,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은 뽀얀 얼굴의 짝꿍이 있어 나는 주춤주춤 선생님의 주위를 맴돌 뿐이었다. 분주한 새 학년이 지나고 환경미화가 시작되었다. 나는 방과 후에 남아서 아이들 몇 명과 선생님을 중심으로 교실을 꾸미는 환경미화 작업을 하게 되었다. 선생님의 손끝에서 탄생한 교실 뒤편 게시판을 정말 멋졌다. 교실 벽면에 판넬을 직접 만들어서 명화를 걸기도 하시고, 아이들이 꾸며야 하는 자유게시판 공간도 아기자기하게 여학생들의 감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환경미화가 끝나갈 무렵 담임선생님께서 조그만 수첩에 선생님의 특기인 붓글씨로 내 한자 이름을 써서 주셨다. 더불어 명화 판넬도 하나 만들어 주셨다. 붉고 긴 머리를 한 아름다운 소녀가 다소곳이 앉아 있는 그림 한 점, 르느와르의 그림이라고 말씀해 주시던 그 판넬을 나는 안방, 거울 옆에 걸어놓고 등교 준비를 하는 아침마다 감상했다. 그림은 르느와르의 ‘이레느깡단베르양의 초상’으로 지금도 내 최애 그림이다.
선생님이 주신 수첩과 판넬 그림으로 나는 한동안 짝꿍과 서먹한 시간을 보냈다. 내 짝꿍은 자기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친구로 담임선생님이 자기가 아닌 나에게 판넬을 만들어 주신 것을 질투했다. 1등을 하는 친구도 아니고, 예쁜 친구도 아닌 내가 그림을 받았다는 사실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모습이었다.
담임선생님이 만들어주신 판넬은 나에게 정말 큰 사건이었다. 단순한 선물이 아니라 내 존재를 인정해 주는 거 같은 느낌, 담임선생님으로부터 나는 관심을 받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짝꿍에게 가졌던 외모 콤플렉스도 그로 인해 상당히 해소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그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미술책에 나오는 그림들을 자세히 보고 명화를 찾아서 보는 나름의 취미를 갖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고등학교 진학을 결정해야 하는 시기가 되었다. 우리 형제들에게 학교 진학은 알아서 형편대로 t선택해야 했다. 엄마는 집안 형편을 고려해서 읍내에 있는 학교에 진학하라고 했고, 나는 대전으로 진학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정확하게 내 의사를 표현하지 않았다. 뻔한 집안 형편에 고집을 피울 수 없어 입을 다물었다.
같은 반 아이들은 담임선생님과 면담하며 성적과 가정형편을 고려해 인문계나 상업계, 또는 방직회사에서 운영하는 야간학교 등을 선택했다. 나는 선생님과의 면담에서 대전으로 진학하고 싶다는 마음만 전하고 어떤 결정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가 계속되었다. 결국 담임선생님이 엄마와 면담을 요청해서 대전으로 진학할 수 있도록 해 주셨다.
우리 반에서 1등을 도맡아 하던, 전교에서도 1~2등을 하던 친구 역시 가정 형편상 여상에 진학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는데 그 친구 역시 담임선생님께서 인문계고등학교에 진학하도록 이끌어주셨다. 친구는 중고등학교 선생님이 되어 30여년 간 교직에 몸담고 있다. 반 학생들의 성향과 가정형편을 잘 알고 아이들 한 명 한 명에게 진로 설계를 해 주셨던 선생님 덕분에 우리 반 아이들은 각자 상황에 맞게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대전으로 유학을 갈 수 있도록 힘써주신 선생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대학 입시에 실패했다. 대학에 진학한 아이들은 선생님 댁에 방문해서 인사를 했다는 말만 전해 들었다. 나는 재수생이되었다. 교육열이 높았던 엄마는 넉넉하지 않은 시골 살림에도 재수를 허락했다. 나는우리 집의 경제사정애 대한 걱정과 계집애가 재수한다는 눈총을 감수해야 했다. 고등학교 진학 때부터 할머니는 “지지배가 지애비 등골 뺀다”는 말로 언니와 나를 힘들게 했는데 재수는 말해 무엇하랴. 재수의 결과도 썩 좋지는 않았다. 대입 면접을 보시던 한 교수님은 “자네는 G선상의 아리아군”이라고 우아하게 표현한 거처럼 나는 겨우 대학에 입학했다.
중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나는 국어국문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내가 유일하게 잘했던 과목이 국어였고, 좋아했던 과목도 국어였으니 나의 전공 선택은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다. 대학 생활이 시작되고 얼마 후 시골집에 갔는데 동창 남자애가 찾아왔다고 할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선생님 댁이 있는 공주에서 대학을 다니던 동창은 선생님께서 내가 대학에 들어갔는지 알아보라고 보내서 왔다고 했단다.
인사도 제대로 드리지 못하는 제자의 안부를 궁금해하시는 선생님. 선생님의 관심은 내가 살아가는 큰 힘이 되었다. 그래도 내가 꽤 괜찮은 사람,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게 해 주셨다. 자존감이 떨어질 때 꺼내 볼 수 있는 행복한 한 장면의 추억을 선물해주셨다.
나는 선생님 통해 주변 사람들에게 따뜻한 시선으로 관심을 가지고 무엇인가 도움을 주는 삶을 꿈꾸게 되었다. 선생님 덕분에 책과 그림을 옆에 끼고 사는 삶을 살게 되었다. 마음속에 살아계신 내 인생의 멘토 선생님 덕분에 사람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지금도 사람들 속에서 성장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길 바라고 내가 가진 것을 나누며 살고자 노력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