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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서 Jun 18. 2024

사람 풍경

사랑하는 엄마가 아니라 존경하는 엄마


나는 어린 시절 엄마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내 기억 속의 엄마는 뜨개질하던 엄마, 동생이 네 살이나 되도록 젖을 물리던 엄마, 오빠와 언니가 싸울 때면 부엌에서 부지깽이 들고 욕을 하며 방으로 내달리던 엄마가 있을 뿐이다.     


나와 관련된 엄마의 기억은 학교와 연관되어 있다. 입학식, 그리고 초등학교 2학년 때다. 나이가 많은 할아버지 선생님은 매부리코라는 별명을 가졌고 마치 동화책에 나오는 마귀할멈처럼 생겼으며 성격은 매우 괴팍했다. 어린 우리는 수업 시간이 공포였고, 선생님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눈치를 봐야 했다.      


어느 날, 나는 이유도 모른 채 볼거리 중이라 부어있는 뺨을 맞았다. 처음으로 누군가로부터 폭력을 당한 나는 무서웠고 억울했다. 집에 와서 뺨을 맞았다고 울면서 하소연했고, 다음 날 엄마는 파스텔톤의 연한 하늘색 코트를 입고 학교에 오셨다. 담임선생님과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담임선생님을 찾아온 엄마가 창피했다. 내 행동에 잘못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선생님의 폭력이 정당화되어서도 안 되는 상황이었는데 나는 왜 엄마를 창피하게 생각했을까. 엄마가 선생님보다 지위나 힘이 약하다고 생각한 것일까. 아무튼 그때 기억은 나에게 창피한 감정으로만 남았다.      


그 후 엄마는 내가 초등학교 다니는 동안 운동회에 매번 오셔서 학부모가 참여하는 달리기도 하고, 온 가족이 함께 꽃마차를 끄는 경기에도 참여하셨다. 졸업식 때도 예쁜 통돌이로 된 상장을 넣는 통을 선물로 준비해서 꽃다발을 들고 오셨다. 바쁜 일손을 잠시 놓고 시간을 내서 기꺼이 찾아와 준 엄마였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상하게 엄마가 오셨다는 사실만 기억나고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엄마를 강렬하게 기억하는 장면은 열 살 때 정도로 추운 겨울밤이었다, 밤에 화장실을 가야 했는데 혼자서는 무서워서 갈 수가 없었다. 지금처럼 화장실이 실내에 있는 게 아니라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가 집 모퉁이를 돌아야 나오는 변소. 낮에도 혼자 가기 꺼려지는데 밤에는 칠흑의 어둠이 깔려 무섭고, 발판 밑의 구멍에서 빨간 손, 파란 손이 불쑥 올라온다는 귀신 이야기가 한창이던 시절이었다. 겨울밤에 화장실을 가는 일은 어둡고, 춥고, 귀찮아서 볼일이 급한 당사자도 함께 가야 하는 사람도 매우 고역이었다. 화장실 안에는 빨간 알전구가 희미했고, 나는 쪼그려 앉아 볼일을 보면서 무서움을 이기려고 밖에서 기다리는 엄마를 부르곤 했다. 엄마의 대답을 들으며 조금은 안심하면서 볼일을 보고 나왔는데 밖에는 엄마가 없었다. 나는 무서움을 떨치려 내달려 신발을 벗어던지고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 들어간 후의 기억은 없다. 다만 먼저 방으로 들어간 엄마. 엄마는 날이 너무 추워서 먼저 들어갔다고 말했지만 나는 혼자서 방으로 들어간 엄마의 행동과 너무 무서웠던, 그리고 엄마가 나를 귀찮게 생각했다는 의구심만 남았다.  

    

엄마와 떨어져 산 시간이 많아서 그랬을까. 내가 초등학교, 중학교에 다닌 9년 동안, 내가 엄마와 함께 생활한 기간은 길지 않다. 봄철부터 가을까지 엄마는 밭 근처에 집을 얻어 살았다. 여름 한철 잠깐 집에 머물렀고, 농번기 가을걷이가 끝나야 겨울 한철을 우리 형제와 함께 지냈다. 엄마 아버지가 한 해 농사를 마무리하고 집에 오면 집에는 대대적인 빨래가 시작되고 농사가 잘된 해에는 축제 분위기였지만 수확이 좋지 않은 해에는 집안 분위기가 우중충했다.      


중학교 3학년 때, 엄마가 보고 싶어서 울었던 기억이 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누구에게 투정을 부릴 수도 없었던 사춘기. 푸르른 가을 하늘은 높기만 하고, 파란 하늘에 뭉게뭉게 피어오른 흰 구름이 둥둥 떠다니던 날, 나는 집 뒤에 있는 아이들의 놀이터였던 커다란 봉분 위에 누워 조용필의 <고추잠자리>를 부르며 울었다. 떠가는 구름이 흘러 흘러 엄마가 있는 곳에 가 닿을 거 같았고, 그 하늘을 향해 ‘엄마야~~~’를 소리높여 부르며 울었다. 오빠와 언니들은 타지에 있고 할머니와 남동생과 나 셋이 지내던 그때 나는 엄마가 보고 싶었고, 그리움과 외로움이 범벅되어 울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자취하면서 나는 엄마와 한집에 살 기회가 없었다. 내가 기억하는 엄마는 말이 없고, 집안 대소사를 바르게 처리하고, 집에 오는 손님들에게 정성으로 대접하고, 작은 체구로 농사일과 집안일을 동시에 해내는 슈퍼우먼 엄마였다. 엄마는 우리 집의 정신적 지주였고, 우리 집안을 책임지는 가장이라고 여기게 됐다. 아버지가 무능하거나 일을 하지 않는 사람도 아니었지만 중요한 선택의 순간, 엄마는 망설임없이 단호하게 선택하고 행동했다. 엄마의 모습을 보며 나는 엄마를 우리 집 가장이라여겼다.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 재수를 할 때도 엄마의 단호한 선택이 있었다.    

  

엄마의 교육열은 어릴 때 엄마가 자란 환경과 관련이 깊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외삼촌과 천재 남매로 소문이 자자했다는 엄마. 여학교에서 장학생으로 입학할 수 있다고 선생님이 학생 유치를 위해 집에까지 찾아올 정도였다고 했다.     

 

외할아버지는 농사 채가 많은 부농으로 삼 형제가 아래윗집에 살면서 농사를 함께 지으셨단다. 세 분의 할머니들은 집안일을 분담해서 살림, 교육, 농사 보조를 했는데 딸이 귀한 집안에서 엄마는 공부 대신 외할머니의 집안일을 도와야 했다. 사촌 오빠들이 대처에서 고등학교, 대학에 다니고 있지만 초등학교 학력에 머물렀던 엄마는 자식들만은 제대로 교육 시키겠다는 의지가 컸다. 여자라는 성차로 배움의 길이 좌절되었기에 엄마는 나에게 재수의 길을 제안할 수 있었던 거다.      


외할아버지의 잘못된 선택으로 가난한 집의 장남인 아버지와 결혼한 엄마. 외할아버지는 ‘가난한 집으로 시집을 가야 딸이 오래 산다.’는 점쟁이 말을 듣고 아버지와 결혼을 시켰단다. 부잣집 외동딸이 가난한 장남을 만나 종일 온몸으로 노동을 해야 했던 엄마. 시할머니의 병수발과 시부모를 모시며 시동생과 시누이가 넷에 자식을 다섯이나 먹여 살려야 하는 책임을 작은 몸에 지게 된 거였다.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 할머니의 잔소리에 지쳐 입은 굳게 닫고 산 엄마는 나에게 존경의 대상이었으나 사랑하는 엄마는 아니었다.    

   

집에서 살림하며 아이들을 돌보는 다정하고 상냥한 엄마는 동화속에나 있을 뿐 내 마음에 엄마는 대단한 사람, 존경할 만한 사람으로 자리했다. 사춘기와 20대 초반의 내 일기장에는 빨리 커서 엄마의 부담을 덜어주고 싶다는 결의찬 다짐과 하루를 반성하는 일들로 점철돼 있었다. 엄마의 교육열 덕분에 주변 사람들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타지로 유학을 가고, 재수해서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던 내가 부담감을 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엄마와 마음의 거리를 좁히지 못한 채 성인이 된 나는 가전제품을 사드리거나 옷을 사드리는 일로 내 책임을 다한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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