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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서 Jun 25. 2024

사람 풍경

마흔 넘어 엄마와 애착을 쌓다

나는 밖에 나가서 사람들과 만나 에너지를 발산하고 일을 하며 성취이 중요한 사람이다. 다정하고 부드러운 성격도 아니다. 결혼이 늦어 30대 후반까지 시골집에 자주 들러 엄마, 아버지를 봐 왔다. 집에 가도 일상적인 대화나 집안 대소사에 대한 엄마의 이야기를 들었으나 엄마와는 일정정도 거리감이 있었다.      


언니들이 엄마와 전화 통화를 자주 하고 엄마와 외출할 때면 팔짱 끼고 두런두런 이야기하며 걸을 때도 나는 뒤에 한 발 떨어져 있었다. 둘째 언니는 엄마 얼굴을 쓰다듬으며 ‘우리 엄마 얼굴 곱다’는 말도 서슴없이 했다. 나는 엄마에게 상냥한 말도 스킨십도 자연스럽게 하지 못했다.      


그런 엄마와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한집에 살게 되었다. 아이 양육을 엄마가 해주셔야 직장생활을 할 수 있는 형편이었다. 서울에는 오빠도 살고 있고, 큰언니도 살고 있고, 각별한 시누이 관계를 자랑하는 고모들도 모두 서울에 살았다. 엄마가 혼자 시골집에서 지내는 것보다 좋다고 가족들은 엄마의 서울행을 대찬성했다. 둘째 언니만 자기 혼자만 떨어져 지방에 산다고 섭섭해했다.     


엄마는 우리 집에서 전업주부로 살게 되었다. 내가 어렸을 때도 자주 보지 못했던 광경이었다. 나는 엄마가 차려주는 저녁을 먹으며 아침밥과 주말에만 밥을 하는 사람이 되었다. 우리 부부가 출근하고,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면 엄마는 매일 아침 청소를 하시니 집은 늘 깨끗했다. 야근이 잦고, 늦게 퇴근을 하면서도 나는 워킹맘의 분주함을 모른 채 살았다. 엄마의 하루가 얼마나 힘들고 답답할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다행히 엄마는 올케언니, 언니들, 고모들, 친정 조카들의 끊임없는 전화에 상담자가 되어 바쁘게 보내셨다.   

   

엄마와 한집에 살게 되면서 나는 엄마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엄마는 사리 분별이 있는 사람이라는 건 변함없었으나 말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엄마의 휴대전화는 24시간 울렸고 엄마는 고모들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다 들어주며 상담자 역할을 했다. 친척이나 시골 동네의 대소사에 빠지지 않고 다니며 관계를 맺었다. 아버지의 사촌은 물론 이종사촌들과도 모임을 하며 많은 사람들 속에서 어른 노릇을 하고 계셨다.       


말투는 여전히 부드럽지 않았으나 친척들은 엄마를 신뢰하고 따랐고, 무엇보다 엄마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공감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전화를 하는 사람처럼 마음 아파하고 걱정하고 그들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앞장섰다. 큰일 앞에서는 가름을 타주며 친정조카들에게는 든든한 버팀몫이 되어주었다. 나만 여전히 엄마의 온기를 느끼지 못한 채 거리감이 있었다.      


엄마와 함께 산 지 3년이 지날 즈음, 엄마는 백내장 수술을 받게 됐다. 수술대로 향하는 엄마는 처음 수술을 경험하는 터라 겁에 질려있었고, 나는 엄마를 부축하고 수술대로 모시고 갔다. 아마도 그때가 내가 엄마와 처음으로 팔짱을 낀 날이 아닐까. 수술은 잘 됐지만 엄마는 눈에 뭔가 들어간 것처럼 불편하다며 어지럼증을 자주 느꼈고, 기력이 많이 쇠잔해지셨다. 전처럼 아침 일찍 일어나지 못하시던 어느 날 아침, 일어나보니 엄마의 방문은 닫혀있고 기척이 없으셨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잠은 깨어계셨는데 얼굴이 퉁퉁 부은해 누워계셨다.       

나는 “엄마, 얼굴이 너무 많이 부었어.”라며 두 손으로 엄마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순간 나는 화들짝 놀라 언른 손을 뗐다. 뜨거운 뚝배기를 멋모르고 만진 아이처럼 순간적으로 나도 모르게 손을 떼고 말았다. 손끝에 느껴지는 감촉이 너무 부드럽고 생경해서 마치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얼굴이 달아올랐고 눈길을 어디에 두어야할지 몰라 난감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방을 나와 아침상을 차리면서도 나는 계속 허둥댔다. 매일 보는 깊은 주름의 엄마 얼굴이 이렇게 부드럽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엄마의 얼굴을 언제 만져보았는지 기억을 더듬어 봤으나 내 기억속에는 없었다. 엄마 손을 잡아 본 기억도 없었다. 수술실에 들어가는 엄마의 팔을 잡아드릴 때 물컹한 팔뚝살이 안타까웠던 며칠 전의 생각이 떠올랐다.   

   

점심시간에 동료와 식사하며 엄마 얼굴을 만진 얘기를 하다가 한차례 눈물 바람을 일으켰다. 엄마의 볼이 너무 부드러워 놀랐다고 말하는 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해묵은 감정이 솟구쳐 오르는 것은 아니었는데 마음의 거리가 확 좁혀진 느낌이랄까. 새삼스럽게 비로소 내 엄마처럼 느껴졌다. 점심 식사 후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몸은 좀 어떤지 궁금해서 전화했다는 내 말에 엄마는 평소와 다름없이 무뚝뚝하게 “괜찮어.”라고 한마디 하고 전화는 툭 끊겼다. 윙윙 신호음만 듣고 서 있는 데 괜히 가슴이 따뜻해졌다.   

   

그 후 나는 엄마와 가까워졌다. 외식을 하고 여행 할 때도 엄마의 팔짱을 끼고 다닐 수 있게 됐다. 엄마의 어린 시절 이야기도 들었다. 엄마라는 존재가 위대한 모성이자 집안을 지탱하는 힘이라 믿었던, 그래서 이상적인, 존경하는 엄마로 존재했던 엄마가 현실적인 엄마로 되살아났다. 시부모 부양, 시동생들 돌보기에 당신의 자식은 항상 두 번째일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아픔도 있었겠다 싶고, 가난한 집안에서 다섯이나 되는 자식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책임감의 무게가 무뚝뚝한 엄마를 만들었다는 생각도 하게 됐다.      


“아침에 해 뜨는 게 그렇게 좋더라. 일을 해서 너희들 공부시킬 수 있다는 거만으로도 힘이 났어. 그때는 희망이 있어서 좋았다.”라는 말을 들으며 나는 마흔이 넘어서 엄마와 애착을 다시 형성했다. 상담심리를 배울 때 애착 이론을 접하면서 절망도 했다. 엄마에 대한 원망도 했고, 아이를 잘못 양육한다는 죄책감도 컸다. 하지만 애착은 언제라도 다시 형성할 수 있다는 걸 경험하면서 애착의 중요성을 다시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     

 

어렸을 때 비록 안정 애착이 형성되지 않아도 얼마든지 안정 애착을 획득할 수 있다.애착대상과 애착을 다시 쌓을 수도 있고, 내 존재를 인정해 주는 단 한 사람만으로도 충분하다. 조부모나 선생님, 멘토, 또는 친구를 통해서도 안정애착을 형성할 수 있다.  사람만이 아니라 좋아하는 일, 잘하는 일로도 안정애착을 획득할 수 있다. 불안정애착이라고 느껴지면 애착대상을 찾아 다시 쌓자. 안정적인 마음이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힘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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