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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서 Jun 29. 2024

사람 풍경

아들 신봉자, 할머니


할머니는 동네에서도 유명한 깔끔쟁이였다. 계절을 가리지 않고 아침마다 단잠을 깨우는 할머니. 온 식구가 아침 일찍 일어나 아침 식사전에 이불을 개고 방과 마루, 마당까지 깨끗이 청소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한겨울에도 인정사정없이 이불을 걷는 할머니는 마치 마귀할멈같았다. 이 과정은 저녁에도 저녁 식사 전에 한차례 반복해야 했다.      


덕분에 방 세 칸에 부엌이 딸린 작은 우리집은 항상 반짝거렸다. 어린 우리 형제자매가 아침잠을 반납하고 일궈낸 성과였다. 노란 장판이 깔린 방바닥은 머리카락 하나 없었고, 황토를 먹인 마룻바닥은 늘 반짝거렸다. 비가 와도 물이 잘 빠지는 마당은 늘 뽀송했고, 풀 한 포기 구경할 수 없었다. 여름 햇살을 받은 마당은 반짝이는 모래알에 눈이 부셨다.      


이엉을 이어 올린 흙담 밑에는 봉숭아, 분꽃, 맨드라미꽃, 쪽두리꽃이라 불리던 풍접초 등이 피어 있었다. 펌프로 물을 길어 올려 여름에도 시원한 물을 대주던 샘의 도랑 가는 담장을 끼고 흘러가는데 그곳에는 보라색 붓꽃이 피고 졌다. 여름이면 봉숭아꽃과 잎을 따고 백번을 빻아서 손톱에 물을 들이고 눈이 내릴 때까지 설레며 기다리기도 했다.      


주말이면 나와 언니를 앞장세운 할머니와 밭에 가야 했다. 봄에는 싹이 난 농작물이 잘 자라도록 김을 매야 했고, 여름에는 웃자람을 막기 위해 순자르기를 해야 했다. 긴 이랑을 보며 ‘언제 이 일을 다하나’ 한숨이 나올 때도 많았다. 순을 자르는 날에는 엄지와 검지에 녹색 물이 들었고, 손을 씻어도 손톱 밑의 녹색물은 잘 빠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녹색물은 시커멓게 변해 학교에 가면 손을 펴지 않았다.     


가을이면 우리 집 마당은 농작물을 말리기 위해 비닐이 깔리고 그때그때 수확한 농작물이 햇살을 받으며 누워있었다. 중학교 2학년 때였다. 그날은 말린 콩을 떨어야 했다. 나는 할머니와 주거니 받거니 도리깨로 콩대를 두드렸다. 두드린 콩대는 골라내고 콩알은 잡티가 들어가지 않게 깨끗한 상태로 골라 부대에 담았다.      


문제는 사방으로 튄 콩을 줍는 일이었다. 담장 밑 축축한 땅에는 콩알이 박혀 잘 빠지지 않았고, 그 콩을 줍다가 나는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왜 나만 맨날 이런 일까지 해야 해”라며 화를 냈고, 할머니에게 야단을 맞았다. 나는 집을 뛰쳐나왔다. 집 옆으로 난 길을 돌아 뒷동산을 끼고 달리며 나는 분을 삭이지 못해 씩씩거렸다. 그런데 할머니가 계속 따라오고 있지 않은가. 결국 동네를 한 바퀴 돌며 쫓고 쫓기는 추격전 끝에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언니는 고등학생이라 읍내에서 학교를 다나고 있었고, 동생은 나하고 세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데 놀러 돌아다니느라 집에 붙어있지 않았다. 왜 나만 맨날 집안일에 농사일까지 해야 하는지 억울하고 분했다.       

내가 할머니에게 더 화가 나는 것은 나에게 그렇게 일을 시키면서도 늘 아들, 아들, 그놈의 아들 타령이었다. 할머니에게 1순위는 아버지였고, 두 번째는 작은아버지, 세 번째는 오빠와 남동생, 네 번째는 사촌 동생들, 다섯 번째는 셋째 할아버지의 귀한 외아들인 당숙이었다. 변하지 않는 순위들에서 내가 빠져서 억울했던 거보다 당신도 여자면서 며느리나 손녀들은 안중에도 없는 그 생각과 행동이 정말 싫었다.      


가부장제는 가장인 남성이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가족구성원을 통솔하는 하면서 여러 가지 역효과를 만들었지만 나는 할머니처럼 남아선호 사상이 강한 여자들이 그 힘을 더 키우고 있다는 생각했다. 나아가 너무나 편협한 가족주의에 맹목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종갓집이라 제사가 많았던 우리 집, 제사 음식 중에서 나는 유독 달걀에 눈을 떼지 못했다. 삶아서 별 모양으로 잘라 놓은 달걀은 흰색 안에 노른자가 꽃처럼 피어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달걀은 언제나 동생과 당숙에게 돌아갔고, 내 차지의 달걀은 없었다. 달걀에 미련이 많았던 나는 고등학생이 되어 자취 생활을 하면서 끼니마다 달걀을 먹었다. 하지만 제사상에 올라오는 별 모양 달걀은 기회가 와도 먹지 않았다. 그걸 먹으면 할머니에게 지는 거 같았다.       


그런 할머니가 동생들을 만나러 가시거나 장에 가실 때는 나를 데리고 가시곤 했다. 산을 하나 넘어야 나오는 할머니 친정 동네는 내가 살던 동네와는 매우 다른 두메산골 마을이었다. 드라마나에서나 볼 수 있는 싸리나무로 엮은 대문을 볼 수 있었고, 논길을 따라 도로로 나가면 느티나무 아래 정자가 있던 마을, 그곳에서 외삼촌할아버지, 이모할머니들, 그리고 촌수를 따지기도 벅찬 그 자손들을 보는 것은 어색하면서도 설렜다. 특별히 여행을 할 수 없던 시절, 집을 떠나는 경험이 살렜으리라.       


신기하고 재미있는 추억을 갖게 해 주신 할머니. 반면 남자, 아들만 선호했던 할머니. 나는 할머니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이나 남성을 선호하게 된 할머니의 삶을 이해하기보다 편협한 사고로 점철되었다고 비난했고, 나는 절대로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남자애들에게 지지 않으려는 경쟁심이 강했고,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남자들보다 약하거나 무능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싫어했다. 특히 남자라고 먼저 승진 기회를 주던 상사들이 정말 싫었다.        


깔끔쟁이였던 할머니는 아침마다 거울을 보며 동백기름을 발라 윤기가 흐르게 머리카락을 빗어서 은비녀로 쪽진 머리를 하셨다. 나이가 드시니 어쩔 수 없이 하얀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고 다리가 불편해서 지팡이까지 짚게 되셨다. 30대 초반의 어느 봄날, 시골집에 갔을 때였다. 지팡이를 마루에 걸쳐 놓은 채 앉아서 이런 저런 말씀을 하던 할머니는 나에게 용돈을 달라고 하셨다. 종종 할머니 용돈을 드리곤 했으나 할머니가 용돈을 달라고 직접 말씀하신 건 처음이었다. 나는 갑자기 심술이 나서 “할머니가 좋아하는 아들, 손자한테 달라고 하셔.”라고 뾰로퉁허게 말했다. 정작 당신이 애지중지하는 손자들보다 알아서 용돈을 챙기는 사람은 난데 야속한 마음이 들었다. 그때까지도 내 마음속에 할머니의 아들, 손주에 대한 사랑을 질투하고 있는 줄 몰랐다. 그것이 할머니와의 마지막이었다.      


86세의 할머니는 여름의 끝자락에서 사랑채 할머니 방에서 돌아가셨다. 둘째 언니네 가족들과 저녁 식사를 잘 하시고 주무시러 가셔서 그날 밤 영영 작별을 고하셨다. 용돈을 달라던 할머니가 마지막 모습이라니. 미안함을 내 마음에 남기고 떠나신 할머니, 할머니는 여러 가지 음식과 꽃과 사람에 대한 추억을 남겨주셨다. 지금도 궁상맞다는 생각이 들정도로 몽당연필이 될 때까지 사용하는 검소함을 유산으로 남겨주셨다. 유별나게 아들과 손자를 사랑했던 할머니, 남자들을 더 사랑했던 거지 여자들을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리라 스스로 위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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