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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서 Jul 02. 2024

사람 풍경

목에 걸린 가시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는 초겨울, 마루에서 엄마는 대바늘로 앙골라 털실을 사용해 남동생의 바지를 짜고 있다. 둘째 언니와 나는 옆에서 남아도는 실로 복주머니를 짠다고 힘겹게 대바늘을 놀리고, 남동생은 옆에 누워서 몸을 이리저리 굴리며 놀고 있다. 내가 동생을 기억하는 첫 장면이다.     


기성복이 있었지만 넉넉지 못한 살림에 엄마는 털실로 우리 형제들에게 옷을 짜서 입히곤 했다. 털실도 귀하던 때라 안 입는 옷이 있으면 그 옷을 풀어 헤쳐 실을 재사용하기도 했다. 엄마가 재사용할 실을 준비할 때면 나는 두 손을 팔 넓이만큼 벌려 낡은 실타래를 걸고 실을 감는 엄마를 기다려야 했다. 그 일은 나에게 무척이나 지루한 일이었다. 예닐곱 살 난 아이가 가만히 앉아서 그것을 기다리는 일이 어찌 쉬웠을까. 이리저리 눈치를 보다가 화장실 가고 싶다며 줄행랑치기 일쑤였다. 엄마가 자투리 실로 짜 주신 형형색색의 속바지는 동생의 트레이드마크였다. 동생이 겉 바지를 걷어 올리고 왼쪽 오른쪽 서로 다른 색으로 짜진 색동 내복을 자랑할 때면 우리 집은 웃음바다가 됐다. 우리 집에 놀러 오는 아줌마들은 그 모습을 보려고 동생에게 속바지 구경을 시켜 달라며 폭소를 터뜨리곤 했다.      


내가 일곱 살 되던 해 아버지와 엄마는 타지에서 밭을 1년 단위로 임대해 농사를 시작했다. 몇 평 되지 않는 자가 소유의 논농사와 밭농사 외에 만평이 넘는 밭 농사로 엄마 아버지는 항상 바빴다. 농사 첫해는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시작했다. 나는 새참 때가 되면 남동생의 손을 잡고 할머니를 따라 밭으로 갔다. 동생이 그때까지 젖을 먹었기 때문이다. 동생이 젖을 먹고 새참 시간이 끝나면 할머니와 집으로 왔다.      


세 살 터울의 동생은 그때부터 내 옆에 붙어 있는 껌딱지였다. 온종일 밭일로 바쁜 엄마 대신 동생은 할머니 손에 자랐고, 일곱 살 때부터 나는 동생과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나는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동생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부모님 대신 동생 담임선생님을 만나 상담했다. 내가 고등학교 진학을 하면서 3년 동안 떨어져 지낸 시기 외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동생과 함께 지냈다. 동생이 언니와 내가 있는 도시로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우리의 동거생활은 다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생활에 잘 적응하는 듯 보였던 동생은 2학년이 되면서 선생님들에게 거칠게 반항하는 행동을 보이기도 하고 태권도장을 다닌다며 공부보다는 운동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결국 동생은 군대에 다녀와 대학에 진학하겠다며 입대했다. 의무경찰을 하면서도 나를 자주 찾아왔다. 군에서 지급되는 얼마 안 되는 월급을 모아 용돈에 보태 쓰라고 슬그머니 내밀기도 하던 순수한 청년이었다. 제대 후에는 대학 대신 경찰 시험을 보겠다며 내가 사는 집으로 왔고, 다행히 첫 시험에서 합격했다. 


첫 발령지는 종로경찰서. 오빠집에서 지내며 착실하게 저축도 하며 사회생활을 시작한 동생. 경찰 생활 삼 년 차가 되는 어느 날, 돌연 사표를 내고 혼자 사는 나에게 왔다. 연희동 파출소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출근하다가 경찰 일이 싫어져 사표를 냈다는 거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도 딱히 대답이 없었고, 그때부터 동생의 방황은 시작됐다.      


여행을 떠나 두어 달씩 소식을 끊기도 하고, 어느 날은 시드니라며 전화를 걸어오기도 했다. 중국으로 두 번째 해외여행을 계획하던 동생은 할머니의 죽음으로 국내에 주저앉았다. 그때부터 동생은 혼자 사는 내 아파트에서 살면서 직업도 없이 세월을 보냈다. 전산원에 다닌다고 등록금을 가져가서는 마치지도 못하고 집에서 빈둥댔다.      


동생과의 생활이 너무 버거웠던 나는 결국, 동생을 떠나 서울로 올라왔다. 혼자 생활하게 된 동생은 늦은 나이에 대학에 진학하겠다고 고시원을 얻어 생활했으나 대학 진학에 실패했고 다시 떠돌았다.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다. 한동안 소식이 없다가 어느 날 갑자기 피골이 상접한 몰골로 회사 앞에서 퇴근하는 나를 기다려 놀라게 하곤했다.   

   

어떻게 살았는지 물으면 강원도에서 시작해 우리나라 최남단까지 걸어서 종단했다고도 하고, 뭔가를 발명해서 특허청에 특허출원을 해서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고도 했다. 미끄럼 방지 욕실용 슬리퍼를 만들어 특허 출원했다며 문서를 보여주기도 했다. 시를 써서 신춘문예 공모에 보내기도 했다.    

  

차를 가져가서는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를 여러 차례, 엄마는 우리 집에서 아이를 돌보고 계셨기 때문에 동생이 혼자서 시골집에 내려가 정착하며 동네 어르신들의 일을 도왔다. 동생 걱정을 한시름 놓던 차, 병원에 입원했다는 동생의 연락을 받았다. 온몸이 퉁퉁부어 병원에 갔더니 ‘루푸스’라는 진단이 나왔단다. 갑작스런 병으로 충격이 심했던지 동생은 피해망상 증상까지 보이며 여기저기 병원을 전전했다. 동생의 글쓰기 재능은 피해망상으로 옆집 아저씨가 자기를 죽이려고 한다는 탄원서를 제출하고, 청와대에 민원을 넣는 곳에 쓰였다.    

  

정착과는 거리가 멀었던 동생은 병원 역시 자기 혼자서 돌아다니며 진료를 받았다.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을 시켜야 하나 고민을 할 때는 이미 신장의 기능이 망가져 결국 대전에 있는 병원에서 투석을 받다가 회생 가망이 없어 시골집으로 갔다. 그러다 추석을 열흘 앞두고 동생은 서른아홉 살의 나이로 스스로 자기 목숨을 거두고 말았다. 나는 자살 가족이 되었다.     


비쩍말라 투석을 받던 동생의 모습, 아무일도 없다는 듯이 관속에 누워있던 동생, 뜨거운 불길 속에 활활 타오르던 관이 오랫동안 눈앞에서 떠나지 않았다. 자식을 앞세운 한으로 말이 없는 엄마를 옆에서 지켜보는 거 또한 쉽지 않았다. “형제가 어떻게 돼요?”라는 질문 앞에서 우물쭈물하는 내가 있었고, 동생의 죽음을 소화하지 못한 채 묻어 두어 매일 밤 악몽을 꿔야 했다.     

 

결국 나에게는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의 우울이 찾아왔고, 먹지도 잠도 못 자는 상태로 3개월여를 보내야 했다. 아홉 살 난 아들의 고사리 손으로 전해주는 영양제 덕분에 에너지가 조금씩 회복되고 일상생활로 돌아오게 됐다. 나는 동생에 대한 글을 쓰게 됐고, 동생에 대해 묵혀 두었던 생각들을 글로 써내려 가면서 ‘동생의 죽음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내가 버리고 혼자 서울에 와서 일찍 죽은 거야.’라는 죄책감도 덜어낼 수 있었다. 투병하면서 겪었을 두려움과 외로움을 느끼며 동생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됐다. 동생을 위해 기도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마음이 안정되면서 안 좋은 모습으로 꿈속에 자주 등장하던 동생과 작별하는 꿈을 꿨다. 우리가 자주 놀러 갔던 들판에서 우리는 웃으며 한 손을 높이 들어 흔들며 작별인사를 나눴고, 이후 동생은 더 이상 내 꿈에 출연하지 않았다. 동생은 이제 내 마음속에 살아있다. 내가 기억하는 한 영원이 함께 살아갈 것이다. 토실토실하게 예뻤던 애기때부터 핸드볼을 한다고 유니폼을 입고 한껏 들떴던 초등학생의 동생, 자취를 하며 주말에 시골집에 내려갔다가 올때면 아쉬움에 방문만 빼꼼열고 내다보던 중학생으 동생, 명문고에 입학했다고 주변에서 자랑스러워하던 장면장면들이 살아있다.      


장 아메리는 자유죽음에서 자살은 살아가면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말했다. 자연의 법칙에 따른 죽음만 생각하던 나에게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의 자살에 대한 생각을 던져준 동생. 더 이상 육신의 아픔과 정신적 고통은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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