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의 우편환
용돈을 국어 사전에서 찾아본다. ‘개인이 자질구레하게 쓰는 돈’ 또는 ‘특별한 목적을 갖지 않고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돈’이라고 나온다. 요즘은 아이들에게도 꼬박꼬박 용돈을 지급하고 경제교육까지 시키는 시대지만 내가 어릴 때는 용돈이라는 명목으로 지급받아 본 기억이 없다. 초등학교 때는 명절에 받은 세뱃돈이나 소풍날, 운동회날에 받는 용돈이 전부였다.
초등학교 4학년, 소풍 전날 방과후에 몇 몇 아이들이 모여 칠판에 햇님을 커다랗게 그린다. 노란색 분필로 햇님을 그리고 그 옆에 비뚤거리는 글씨로 “햇님, 내일 제발 비가 오지 않게 해주세요.”라고 하얀색, 빨간색, 파라색 분필로 써 놓는다. 비가 오면 소풍은 취소되기에 아이들은 소풍 전날까지 날씨 때문에 마음졸인다.
매년 봄, 가을 소풍 장소는 똑같다. 봄에는 벚꽃이 흐드러지는 산, 가을에는 호수가 있고 넓은 공터가 자리해 가을 풍경이 아름다운 곳이다. 중학교 때까지 같은 장소로 다녔으나 소풍은 언제나 기다려지는 날이다. 도시락도 평소와 다르다. 김치, 콩자반, 멸치볶음, 단무지무침이 아니다. 분홍 소시지, 노랑 단무지, 주황색 당근, 초록의 시금치나 부추가 어우러진 김밥이 말린 때면 고소한 기름냄새로 집안은 온통 잔칫집 분위기다.
아침 일찍 일어나 김밥을 말고 계신 할머니 옆에서 김밥 꼬투리를 먹기 위한 눈치 작전이 시작된다. 김밥을 자르는 찰나를 놓치지 않고 재빠르게 손을 뻗어야 내 차지가 된다. 동생에게는 온전하게 둥글고 예쁜 김밥이 주어지지만 나와 언니는 꼬투리라도 경쟁을 해야 먹을 수 있다. 그렇게 먹는 김밥 꼬투리의 맛은 어떤 음식보다 맛이 좋다. 양은 도시락에 예쁘게 놓인 김밥과 전날 동네 구멍가게에서 사다 놓은 과자와 사이다. 가방에 챙기는 순간이 바로 천국이다. 세상에 부러울 거 하나 없다. 그리고 손에 쥐어지는 50원짜리 동전하나. 이게 바로 소풍의 진한 맛이다. 그러니 소풍 전날 비라도 내리면 얼마나 큰 낭패인가.
중학교 때는 금전출납부를 써서 용돈을 받았다. 용돈이 아니라 자습서나 문구를 사는데 사용하는 돈이다. 어쨌든 부모님께 받은 돈과 지출 내용이 같아야 했다. 금전출납부를 확인하신 후 아버지는 돈을 주셨다. 학기 초에 자습서나 노트는 다 갖추어지기 마련. 중간에 돈을 탈 수 있는 경우는 미술이나 가정가사 시간에 사용하는 준비물을 사는데 필요한 돈이다. 그러니 특별한 목적을 갖지 않고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돈이라는 용돈이 사실상 주어지지 않는 게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쉬는 시간이나 하교 길에 문구점을 들랑거리며 주전부리를 어떻게 사 먹을 수 있었을까. 당시에는 별사탕이 들어있는 과자가 가장 인기있는 품목이었다. 별사탕이 몇 개 들어있는지가 그 날의 운을 좌우한다.
껌종이를 모아 형형색색의 학을 접고, 방석을 접었던 시절, 그 때 나는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껌 종류는 모두 한 개씩 수집했다. 롯데, 해태, 오리온. 이름도 생소한 회사의 껌 종류는 모두 사 모았다. 식구들에게 들키면 큰 일나는 상황, 껌들은 책상 서랍 속 깊숙이 비밀 일기장과 함께 껌들이 들어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건 거짓 금전출납부 덕분이다. 스케치북이나 그림붓, 물감의 비용이 실제 가격보다 높게 책정된다. 물론 거스름돈을 부모님께 가져다 드리지 않는다. 내가 스스로 용돈으로 사용하는 거다. 고맙게도 아버지는 주신 돈과 금전출납부의 지출항목만 확인하셨고, 사용처에 대해 물으시지 않으셨다. 커서 알게됐다. 매달 정기적으로 용돈을 주는 개념이 없던 시절, 아버지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 돈을 주셨다는 것을. 금전출납부만은 확인하셨던 게 아버지 나름의 경제교육이었음도.
고등학교 때부터 매달 생활비를 받았다. 타지에서 언니와 자취를 하다보니 매월 생활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정기적인 수입이 아니고 농사 지은 수확물을 매매해야 현금이 돌던 시골에서는 매월 정기적인 생활비 지급이 만만치않았으리라. 당연히 우리의 용돈은 매월 부족한 느낌이랄까. 생활비에 용돈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도 다행인건 항상 언니와 나에게 따로 지급되었다는 것이다. 언니는 대학생이라 나보다 많은 돈을 지급받았으나 언제나 내 용돈은 언니거나 다름없었다.
우리들의 자취 생활 중에 가끔씩 가뭄에 단비같은 용돈이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용돈이었다. 학용품을 사는 데 사용하는 또는 생활비에 사용하는 돈이 아니라 순수하게 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돈. 서울에서 직장에 다니는 오빠가 보내준 용돈. 동생이 넷이나 되다보니 대학을 포기하고 직업 전선에 뛰어든 오빠가 편지와 함께 돈을 보내주는 용존. 글씨를 정자체로 잘 썼던 오빠는 눈이 부시게 하얀 종이에 네모 박스로 검정 줄이 쳐진 편지지에 “돼지야, 아이스크림이라도 사 먹어라.”라는 편지와 함께 돈을 부쳐왔다.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통통했던 나는 오빠에게 ‘돼지’라는 놀림을 많이 받았다. 그 편지를 받을 때는 ‘돼지’라는 호칭마저 기분 좋았다.
현금지급기나 인터넷 뱅킹이 없던 시절, 오빠가 부쳐준 돈은 우편환이었다. 금액이 적힌 종이를 들고 우체국에 가서 돈으로 바꿔야 했다. 언니와 나는 우체국에 가서 우편환을 바꾸어 아이스크림을 사먹는 호사를 누렸다. 그때처럼 오빠가 자랑스러울 때가 없었다. 돈을 보내주는 오빠라서라기보다 동생들을 위해 직장을 선택한 오빠. 동생들 때문에 희생을 했다는 미안함도 있었지만 직장생활을 하는 오빠는 엄청 멋있어 보였다. 오빠는 알라딘 요술램프에서 나오는 거인만큼 컸다. 나중에 오빠에게 들었다. 우리들 때문에 대학을 포기한 게 아니라고. 당시 부모님은 야간대학이라도 진학하라고 말씀하셨지만 오빠는 공부가 하기 싫었단다.
내가 생각해도 오빠는 공부에 관심이 없었다. 중학교에 다닐 때도 오빠는 공부보다는 하모니카를 불거나 썰매를 만들거나 하는 거에 능한 편이었다. 먼 발치에서 아버지가 귀가하시는 모습이 보이면 얼른 책상에 가서 앉았던 오빠. 한 여름 어둠이 내려 앉을 즈음 뒷동산에 앉아서 하모니카를 불던 오빠의 실루엣이 생각난다. 다리 하나는 뻗치게, 한 다리는 무릎을 세워 그 위에 두 팔을 괴고 하모니카를 불던 오빠. 청량하면서도 구슬픈 하모니카 소리가 지금도 들린다. 지금도 오빠는 노래를 잘 부른다. 노래방 단골손님일 정도다.
부모님도 돌아가시고, 남동생도 없는 지금, 우리 자매들에게 유일한 남자인 오빠. 오빠 얼굴을 못 본지 2년이 되어간다. 오빠집을 친정처럼 드나들며 술 한잔 하는 사이였는데 동생 문제로 금전이 얽히면서 서로의 기억이 달라 아직도 풀지 못한 상태다. 오빠를 찾아가 대화를 해야지 하면서도 자꾸 미루는 내가 있다. 오빠의 하모니카 소리와 우편환을 추억을 쓰다보니 금전적인 오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조만간 오빠와 만나 술 한잔 하면서 고마움을 전하고 엉킨 실타래를 풀리라. 더 늦기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