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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서 Jul 13. 2024

사람 풍경

K 장녀, 큰언니의 굽은 팔

나에게는 ‘K장녀’로 불리는 언니가 있다. ‘K장녀’는 단순히 한국(Korea)에서 태어난 첫째 딸을 의미하지 않는다.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자신을 희생하거나 감정적으로 억압받으며 살아온 여성들이 스스로를 자조적으로 지칭할 때 ‘나 K장녀야’라는 말을 사용하곤 한다. 시기적으로는 주로 1950년대에서 1980년대에 걸쳐 대한민국에서 장녀로 자란 여성들을 지칭한다. 이 시기는 한국 전쟁 이후 우리나라가 급격한 경제 성장과 사회 변화를 겪었던 시기이다.


1960년생 언니. 맨 위로 오빠가 있었지만 오빠는 장손이라 늘 특별 대우였다. 반면 오빠와 두 살 터울의 언니는 그야말로 살림밑천인 맏딸로 동생들을 돌봐야 하는 책임을 면하기 어려웠다. 농번기가 되면 언니는 학교에 가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학교에 가면 친구들과 놀기도 하고 동생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지만 결석을 해야 하는 상황은 많기도 했다.      


지금은 벼를 논에서 기계를 이용해 바로 수확하지만 1970년 대만 해도 벼를 집으로 들여와 마당에서 작업을 했다. 마당에는 멍석이 깔리고 멍석 가장자리에 홀태가 빙 둘러 설치된다. 홀태 하나에 사람들이 한 명씩 서서 볏단을 풀러 한 움큼씩 쥐고 홀태 사이에 넣어 벼낟알을 훓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무로 만들어진 탈곡기가 나왔다. 발로 밟으며 볏단을 넣으면 덜덜덜 소리를 내며 낟알을 걸러내는 탈곡기가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언니가 초등학교 5학년 때, 그 날도 언니는 학교에 가지 못했다. 집에서 타작을 해야 하니 동생을 돌볼 사람이 없어서다. 언니는 나를 맡아서 돌봐야 하는 상황, 한창 놀기 좋아할 나이에 어린 동생을 업고 하루를 보내야 하는 그 마음이 오죽했을까. 와중에 언니는 넘어져서 팔을 다쳤다. 부모님은 급한 상황에 읍내 병원까지는 너무 멀고 면소재지에 있는 접골원 비슷한 곳에서 치료를 받게 했다. 의료시설도 낙후돼 있던 그 시절, 언니의 팔은 제대로 치료가 되지 않았다. 언니는 평생 한쪽 팔을 뻗으면 팔꿈치 위로 뼈가 약간 솟아 있고 굽은 형태로 살아야 했다.          


중학교 진학도 미루어졌다. 오빠가 중학교 3학년으로 진급하는 상황에서 두 명의 중학생 학비를 감당하기 어려웠던 부모님은 끝내 언니의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셨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언니는 기술을 배우라는 주변 사람들의 권유로 상경했다. 종조할머니의 동생이 운영하는 양장점에 조수로 취업한 것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팔바지를 펄럭이며 큰 가방을 하나 든 언니는 집으로 내려왔다. 서울 생활이 낯설어 견디기 힘들었던 거 같다.      


집에 내려와 아버지의 밭일 도우미로 일하며 사람들의 먹거리를 챙기던 언니는 읍내에 있는 야간 중학교에 입학했다. 초등학교 때 결석이 잦았던 탓에 배움에 대한 열망이 컸던 언니는 학교에 다니면서 공부도 열심히 했고 총각선생님을 남몰래 좋아하는 거 같기도 했다. 언니는 만학의 꿈을 이루기 위해 주경야독하면서 장학금도 받아서 식구들을 놀라게 했다.  

    

학교를 졸업한 후 언니는 취업을 해서 다시 상경했고, 스물세 살에 막내 고모의 중매로 언니는 약혼식을 했다. 고등학교 2학년 겨울 방학, 예비형부를 따라 남산 타워 레스토랑에서의 식사는 나에게 꿈만 같았다. 촌아이가 서울, 남산 타워에서 저녁이라니. 그보다 더 환상적인 경험이 있을 수 없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언니는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을 마치고 집에 도착해서 아버지는 펑펑 우셨다. 언니가 혼수로 해달라는 무엇인가를 해주지 않았다며 눈물과 콧물을 흘리며 많이도 우셨다.   


언니는 아들 형제를 두고 있다. 큰 아이는 내 생애 첫 조카였다. 나는 좋은 이모가 되고 싶었다. 학창시절 내게 세상에서 가장 부러운 아이들은 이모가 있는 아이들이었다. 중학교 때 나와 친한 친구는 이모와 네 살차이였는데 그 사이가 친자매보다 돈독해보여서 정말 부러웠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이모가 없다. 엄마에게도 언니가 있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대학생이었던 나는 방학 때면 조카들을 보러 언니집에 놀러가곤 했다. 한 번은 내가 사는 자취집에 다섯 살 조카를 데리고 왔다가 아이를 돌볼줄 몰라 진땀을 뺐다. 예뻐서 어쩔 줄 몰라하며 잠시 같이 노는 것은 가능했으나 종일 데리고 챙기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는 일이었다. 쩔쩔매다가 시골집에 데려다 놓고 몰래 도망쳤던 기억이 생생하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부터는 조카들에게 동화책도 사주고 용돈으로 성적을 올리도록 동기부여도 해주었다. 그렇게나마 언니를 조금이라도 돕고 싶었다. 내 마음에는 항상 언니의 굽은 팔이 남아 있었고, 미안함이 있었다. ‘나 때문에 언니 팔이 그렇게 되었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아 언젠가는 꼭 언니의 팔을 고쳐주겠다는 마음이 자리했다.      


나에게는 미안하고 안타까운 언니였는데 엄마에게는 어떤 딸이었는지 차마 물어보지 못했다. 부모 자식 관계에서도 입이 떨어지지 않는 질문이 있었다. 괜히 엄마의 상처를 건드리는 건 아닌지 조심스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니는 엄마가 돌아가실 때까지 용돈을 빼놓지 않고 정기적으로 보낸 유일한 자식이었다. 매일 엄마와 통화를 하고 딸 집에서는 살지 않겠다던 엄마가 속풀이를 하던 유일한 대상도 언니였다.    

    

부모님을 도와 동생들을 돌보고 집안일을 하는 것이 일상적인 역할로 가사 노동의 주축이었으며, 부모님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교육이나 취업의 기회에서 동생들에게 양보해야 하며 자신의 꿈이나 욕망의 억압을 받았던 가족의 희생자이자, 장녀로서의 책임감과 부담감이 심리적으로 큰 부담을 안았던 K장녀의 특징을 고스란히 지닌 큰언니.      


지금은 손주들을 돌보느라 여념이 없지만 김치 담그니 가져가라고 전화하는 큰언니는 여전히 친정의 장녀로 살고 있다. 원하지 않았지만 책임감이 강하게 장착됐고, 자립심이 강한 성격을 갖게 된 언니. 때로는 ‘고집이 너무 세, 자기 주장이 너무 강해.’라며 머리를 가로 젓지만 큰언니는 나에게까지 엄마 역할을 하느라 오늘도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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