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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서 Jul 20. 2024

사람 풍경

내 삶에 향기를 더하는 친구들


노래 경연 프로그램을 유난히 좋아하는 나. 그 프로그램만큼은 본방송을 사수하려는  편이었다. 한 트로트 경연 프로그램 마지막 날, 그날은 일이 있어 방송을 시청하지 못했다. 방송이 끝나자마자 나는 다른 채널을 통해 내가 응원하는 가수의 노래를 찾아봤다. 그가 마지막 경연에에서 부른 노래는 ‘그대 내 친구여’였다.      


“어둠 속에서 혼자 울고 있을 때

나의 손을 꼭 잡아 준 사람

비바람 불어도 늘 곁에 있어 준 사람

그건 바로 당신이었오.”      


노래를 듣자마자 울컥하며 목이 메었고, 눈물이 두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드라마를 시청하다가 눈물을 흘리는 일은 다반사였으나 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는 일은 드물었다. 노래가 너무 좋아서 가슴속에서 몽글몽글 벅찬 감동이 피어오르거나 코끝이 찡하고 눈물이 고이는 경우는 있지만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일은 흔치 않았다. 그 순간 ‘그래, 나에게 저 가사와 꼭 맞는 친국가 있지. 가족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친구들’.      


1986년 봄, 문과대학 뒤 청라언덕 위 벤치에서 우리는 만났다. 신입생 환영회, 과 대표 선출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학기가 시작되자 대학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시골 출신 아이 세 명이 모여서 이야기를 하게 됐다. 논산, 당진, 청양. 그야 말로 시골 아이들이 상경하지 못한 아쉬움과 국립대학이라도 다닌다는 자부심이 조금은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휩쓸려 다니지 말고 스터디라도 하자는 취지로 얘기를 하게 되었고, 의기투합했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불확실성, 그리고 시골에서 여자 아이들이 대학에 다닌다는 부담이 우리를 뭉치게 했다. 청춘은 방황이 특권이고, 대학만 가면 하고 싶은 모든 걸 해볼 수 있을 거라는 환상이 가득했지만 독립된 자취방 하나 갖기도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두 명의 친구가 합류했다. 우리 들 중 한 친구가 수업을 빼고 바다를 보러 가는 버스 안에서 만난 친구, 학과 부대표활동하는 친구와 친하게 된 또 한 친구였다. 그들은 우리와 다르게 대전에서 나고 자란 친구들이었다. 1년은 그야말로 눈 한번 감았다 뜬 거처럼 금방 지나갔다.    

  

2학년이 되자 학교는 그 어느 때보다 혼돈의 시기가 됐다.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고, 전두환 정권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개헌에 대한 논의를 금지한다’는 4.13 호헌조치를 발표했다. 4.19 현판식에 참석했던 학생들이 구속되면서 학교는 들끓기 시작했다. 매일 같이 호헌철폐를 외치는 집회가 열리고 학교 앞에는 같은 나이 또래의 젊은이들이 시위대와 전투경찰로 나뉘어 대치상황을 벌였다. 집회가 있는 날에는 눈 밑에 치약을 발랐으나 허사였다. 일명 지랄탄이라 부른 최루탄은 마치 뱀처럼 꼬불꼬불 동선을 그리며 바닥으로 기어와 터져서 눈물 콧물을 쏟게 했다. 교내에서는 시국 집회 참석을 위한 참석과 휴강 여부를 놓고 학생들끼리 대립했다. 결국 6월 9일을 연세대학생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혼수상태에 빠지는 사건이 발생했고, 전국민이 시위에 참석해 6.29 선언이라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이뤄냈다.      


우리나라의 현대 역사 한가운데서 2학년 1학기를 보내고 2학기가 되자 학교는 총학생이장을 비롯한 각 과의 학회장 선거 시기가 도래했다. 학생회는 학생들이 이끌어가는 자치활동기구였으나 유난히 보수적인 성향을 띤 우리과는 학회장 또한 보수성향을 원했다. 크고 작은 행사가 많은 우리과 특성상 교수나 조교들과의 긴밀한 관계가 필요한 학생회 구성이 중요했다. 학과에서는 당연히 총학생회와 무관하게 말을 잘듣는 학생회를 원했다. 너무나 보수적인 성향의 예비역 선배와 그와 다름없는 한 친구가 한 조가 되어 학회장 선거에 입후보하자 우리 친구들은 그들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우리도 학회장 후보를 냈다. 더할 나위 없이 보수적인 학과에서 여자들로 구성된 학회장, 부학회장 후보는 교수진과 조교들의 암묵적인 반대와 예비역 선배들의 눈총을 한몸에 받아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결성한 후보가 당선되었고, 첫 여자 학회장이 탄생했다. 학과 설립 60년이 지난 지금도 여자학회장이 배출되지 않고 있다.   


3학년 때는 학회일로 한 해를 보내고 우리들 무리에 학회장 친구가 합류하여 6명이 되었다. 학교 앞에서 앞집, 옆집에 붙어 자취를 하며 한 집에 모여 밤샘을 하는 날도 많았다. 방학이 되면 배낭 한 가득 먹을 거리를 짊어지고 밤에서 밤으로 기차를 갈아타고 전국을 누비고 다녔다. 경비가 넉넉하지 못해 밤기차를 주로 이용하고 기차노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는 여관 방을 전전했다. 광주에서는 여관 방에서 밥을 해 먹는 웃지못할 광경을 연출했고, 비오는 여름 인천에서는 여인숙에 머물게 되었는데 옆방에서 들리는 남녀의 신음소리에 무섭고 기괴해서 문고리를 잡고 밤을 새우기도 했다. 음악 다방, 호프집, 포장마차를 다니며 젊음의 치기를 주체하지 못해 방황하고, 만화책을 빌려서 밤새 돌려가며 읽기도 했다. 태백산맥이 출간되기 시작했던 시절, 한 친구가 책을 사면 번호를 타서 기다리며 읽고, 토론했다. 


취업 준비도 없이 졸업을 하게 된 우리들, 방황의 시기도 있었지만 교수 추천으로 신문사에 입사한 친구, 아버지의 소개로 연구소에 입사한 친구, 대학원에 진학한 친구, 선배의 소개로 출판사에 취업한 친구, 대학을 6년 다닌 친구는 각자의 자리에서 사회생활을 했다. 스물여섯 살에 처음 결혼한 친구를 시작으로 마흔 살이 넘어 결혼을 한 친구까지 각자이면서 또 같이 우리는 많은 시간을 보냈다. 


<명랑한 은둔자>에서 캐럴라인 냅은 “우정은 아주 어려울 수도 있고 아주 덧없을 수도 있다. 영혼의 짝을 찾아내고 그 사람에게 헌신하는 데는-관계를 성장시키고, 어려운 시기를 견디고, 필연적인 실망을 극복하는 데는-시간 면에서나 감정 자원 면에서나 적잖은 투자가 든다.”고 했다.     

 

우리의 관계도 그랬다. 6명이 모두 같은 크기의 친밀도가 있는 게 아니기에 속앓이도 해가며 때론 감정 싸움을 벌이기도 하고, 때론 술판을 벌이며 소리높여 싸우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들 사이에는 30년이 넘는 시간 투자가 있었고,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모여서 해결책을 모색했다. 각자 처한 가정사에서 온전한 지지를 받지 못하고 성장한 우리들은 서로를 의지하며 서로에게 지지자가 되어주었다. 결혼, 부모님 회갑, 출산, 이사 등 수많은 애경사를 함께했다.      


힘들 때마다 친구들은 기꺼이 모여주었고, 경제적으로 힘들 때는 기꺼이 통장에 상당액의 금액을 투척해 주었다. 입금 액수보다 더 큰 그들의 마음, 힘든 과정의 감정까지 헤아려 공감해주고 위로가 되는 친구들. 이제는 남편과 사별한 친구도 있을 정도로 나이를 먹었지만 우리의 관계는 현재진행형이다. 필요한 순간에 언제나 그 자리에 있어 주는 친구들. 그들의 은근하고 때론 거침없이 격렬한 향기는 내 삶에 녹아 있다. 프란시스 베이컨의 말처럼 ‘우정은 삶의 향기’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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