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민서 Jul 23. 2024

하늘 풍경

나를 지켜준 한마디


사보팀에서 일할 때 사내 소식지 페이지 구성안에 ‘나를 지켜준 한마디’ 코너가 있었다. 직원 중 한 명을 선정해서 원고를 청탁하면 지금까지 살면서 삶의 지침이 되는 말을 작성한 원고를 받아 뒷표지 안쪽에 실었다. 안쪽이지만 표지에 실리다보니 꽤 나 인기 있는 코너였다. 원고를 읽다보면 신기하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모님께 들었던 말이 삶의 지침이 되었다. 가끔씩 스승이나 책에서 발견한 한 문장일 때도 있었지만 부모님께 들은 말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가치관이 형성되기 전 부모님께 들은 말이 평생의 지침으로 작용하는 것을 보며 부모 역할의 엄중함을 느끼곤 했다. 부모님에게 들은 한마디 인정의 말이 재산보다 더 큰 유산임도 알게 됐다. 그 코너를 편집할 때마다 ‘나를 지켜준 한마디’는 무엇일까 생각했다. 배움이 짧고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못했지만 늘 부지런한 모습을 보여주셨던 우리 부모님은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대학 재학 중 학비의 절반은 장학금으로 해결했지만 매달 생활비를 꼬박꼬박 주셨던 부모님. 넉넉한 액수는 아니었지만 일년에 한 번 수확한 농산물을 팔아야 돈이 되는 농사꾼에게 매달 생활비를 주는 것이 만만치 않았을텐데 부모님은 생활비를 미룬 적이 거의 없었다. 두 분이 모두 돌아가셨을 때는 천 여평의 밭과 값도 나가지 않는 시골집 한 채가 남아 있었다. 집은 동생이 죽기 전 동생 앞으로 명의가 이전되어 있었고, 밭은 오빠에게 주라는 엄마의 간곡한 유언이 있었다. 엄마의 통장에는 천 만원도 되지 않는 현금이 조금 있을 뿐이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부모님 집에 전자제품이며 부모님 옷을 사드리고 용돈도 드렸다. 결혼할 때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마 혼자 사시는지라 금전적인 도움없이 내 힘으로 결혼자금을 마련했다. 고맙게도 작은아버지와 오빠 언니들이 전자제품을 한가지씩 해주었다. 딱히 정기적인 수입이 없던 엄마에게 축의금을 모두 드렸다. 성인이 되어 부모님께 금전적으로 도움을 받은 적이 없었고, 돌아가시고 나서도 정말 한푼도 받지 못했다. 우리 부모님은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가셨다. 깔끔하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셨다.  

    

대학교 학비를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며 혼자서 생계를 꾸리는 일이 너무 익숙했던 나는 부모님께 물질적 유산은 한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평생을 열심히 사는 모습으로 모범이 되어주셨기에 우리 형제들은 한 번 시작한 일은 끝까지 성실한 자세로 임하는 생활태도를 유산으로 받았다. 나는 지금도 개인적으로 시작한 모임도 거의 빠지는 일없이 참석을 하고 있다. 내가 선택했고, 상대방과의 약속이기에 지켜나간다.  

    

또다른 유산들이 나에게는 많다. 어린 시절 우리집에는 항상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친적들은 물론 동네 사람들도 많이 왔다. 아무리 늦은 밤이라도 엄마는 먼 길 오신 친척들에게 늘 따뜻한 밥을 지어 대접했고, 동네 사람들에게도 고구마나 감자라도 대접했다. 엄마는 늘 말씀하셨다.   

  

“내 집에 온 손님을 맨입으로 보내지 마라.”     


아이를 돌봐주기 위해 우리집에서 같이 살 때도 일주일에 한 번씩 방문하는 학습지 선생님을 위해 매번 새로운 간식을 준비하느라 엄마의 머릿속은 바쁘게 돌아갔고, 저녁시간이면 선생님에게 밥상도 차려주셨다. 학습지 선생님은 시간을 정해서 움직이므로 오히려 부담된다고 말해도 엄마는 늘 같은 말씀으로 받았다. “우리 집에 온 사람을 어떻게 맨입으로 보내느냐”고.  


엄마가 강조한 또 한가지가 있다.      


“사람을 층하없이 대해라.”     


‘층하없이’는 순전히 엄마의 용어다.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지위가 높든 낮든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서는 차별이 없고 평등하게 대하라는 말이었다. 사람과의 관계 비법이 들어있는 말이다. 엄마는 외할아버지가 사람을 대하는 방법이 그러했다고 하셨다. 집에서 일하는 종들에게도 늘 배불리 먹이고 그들의 살림을 살폈고, 6•25때도 국군이나 인민군을 구별하지 않고 배고픈이들에게는 언제나 배불리 밥을 먹인 덕분에 오히려 그들의 보호를 받았단다.      


그런 태도로 사람을 대하는 엄마였기에 엄마의 주변에는 늘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서울에서도 이웃집 할머니들과 잘 지냈으며 우리집에는 매일같이 할머니들이 두세분씩 찾아왔다. 고모들은 올케언니를 친정엄마라고 생각했고, 엄마의 친정 조카들도 고모가 아니라 엄마처럼 안부전화는 물론 때때로 모시고 가서 며칠씩 밤을 지샜다.      


아버지 또한 사람사이의 관계에 있어서는 누구한테도 뒤지 않는다. 아버지의 사교성은 우리 동네를 넘어 이웃하는 세 개 동네를 넘나들었다. '삼동네'라 부르는 시골에서 가장 인기있는 사람이 아버지였다. 농한기가 되면 아버지는 농산물 수확물이 적어서 판로가 어려운 집의 농산물을 중개하는 일도 하셨다. 유머가 뛰어났던 아버지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셨다.     

  

어느 여름밤 마루에서 낮잠을 자다가 밤이 되어 깨어난 열 살 밖에 되지 않은 어린 나에게 아버지는 밤하늘을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저기 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있다. 큰별도 있고 작은별도 있지. 봐라, 저기 별들은 모두 빛이 나지? 아무리 작은별이라도 빛이 난단다.” 그때는 그게 무슨 말인지 의미를 알지못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사업부서에서 조직의 관리자로 일하던 때, 문득 아버지의 말씀이 생각났다. 적게는 10여명에서 많게는 20여 명의 사람들을 관리하는 업무는 쉽지 않았고 각자 다른 재능과 능력을 가진 그들을 보며 힘겨워할 때 “작은별도 빛난다”는 말은 한줄기 빛으로 다가왔다.    

  

동생문제로 힘겹던 20대 후반의 어느 날 아버지로부터 “우리집 자식들 중 겉으로 보기에는 가장 욕심많고 독한 거 같지만 네가 마음이 제일 약하다”는 말씀을 듣고 울컥했던 기억이 있다. 다섯 명의 형제자매들 사이에서 각자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물질로 마음으로 도움을 주고 문제를 해결해야 했던 나에게 아버지의 말씀은 말할 수 없는 위로가 되었다. 나의 모토는 외유내강이었는데 나는 ‘외강내유형 인간’이었던 것이다. 여린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겉으로 강한 척 하며 살았던 거였다. 내 속마음아버지는 어떻게 알아채셨을까. 

     

물질적인 유산을 하나도 받지 못했지만 나는 부모님께 많은 것을 유산으로 받았다. 나를 지켜준 한마디가 아니라 나를 지켜준 세마디가 내 삶의 지향점으로 자리잡았다.    

   

“작은 별도 빛난다.”

“우리집에 온 손님을 맨입으로 보내지마라.”

“사람을 층하없이 대하라.”     


여기에는 세상살이에 필요한 모든 것이 담겨있다. 거칠지만 그 어떤 성현들의 말보다 마음속 깊이 내려앉아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부모님의 유산. 존재의 인정과 베품, 사람관계 방법까지. 이보다 더 큰 유산이 어디있을까. 자식을 키우는 입장에서 나는 어떤 유산을 물려줄까 생각하며 부모님께 받은 유산을 내 아이에게도 물려주고 싶다.      

이전 19화 사람 풍경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