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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서 Aug 13. 2024

바다 풍경

손 잡으면 결혼해야 하는 거아.

스무살, 단어만 들어도 뭔가 찬란하고 싱그러움이 묻어나는 느낌이 물씬 났다. 성인이 되어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같고, 세상이 온통 핑크빛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나를 기다리는 스무살은 상상과 전혀 다른 칙칙하고 암울하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간이었다.        


나는 검정색 가방, 줄에 빨간색이 들어가 있고, 로고에도 빨강 테두리가 그려진 커다란 나이키 가방에 책과 두 개의 도시락을 넣고, 같은 브랜드의 신발주머니를 들고 재수종합반으로 등원했다. 당시 내가 사는 지방에는 재수종합학원이 효성학원과 대성학원 두 군데가 있었다. 나는 자취방에서 가까운 대성학원에 다녔다. 언니가 대학교 4학년, 동생이 고등학교 1학년이라 일단 내가 비빌 수 있는 공간이 있었던 것도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학원에서 영어단어를 외우고, 세계역사 계보를 외우며 진땀을 빼고 있을 때 대학 신입생이 된 친구들은 한 달에 한번 정도 학원으로 위문방문을 했고, 편지를 보냈다. 신입생답게 미팅 이야기가 주를 이뤘고, 한 학기가 지날 즈음에는 연애를 하는 친구도 생겼다. 먼나라 이야기처럼 친구들의 연애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밀도가 높은 학원 교실에서 잠과 싸우며 찬란한 스무살을 보냈다.        


면접보시던 교수님은 나에게 ‘G선상의 아리아’를 빗대어 ‘커트라인선상의 아리아’라고 말하며 논술 성적 덕분에 합격을 하게 될 거 같다고 했다. 당시 논술 주제는 ‘이상과 현실의 조화’였고 나는 나의 이상과 재수생활의 현실에 대해 쓰면서 땅에 발을 굳건히 딛고 서야 함을 주장했다. 교수님 말대로 간신히 입학한 나. 학과에는 2학년에 재학중인 고등학교 동기들이 몇 명있었고, 신입생 중에는 고등학교 후배가 7명이나 되어 그들에게 언니라 불리며 대학생활이 시작되었다. 다행히 고등학교 때 단짝 친구와 학과는 다르지만 같이 입학을 하게 되어 그 친구의 자취방을 오가며 움츠러든 마음을 달랠 수 있었다.      


학기 초부터 여학생들은 미팅을 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냈다. 문과 대학에 속한 우리과는 여학생이 압도적으로 많아 경상대나 공과대학들과 미팅이 많았다. 나는 미팅에 관심이 없었다. 나는 ‘나이도 한 살 많아, 나는 예쁘지도 않아.’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라 미팅에 참석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는 이성에 대한 관점이 없었다. 지적이고 낭만이 있으며 무엇보다 상대에 대한 나의 느낌이 중요하다는 막연함이 있을 뿐이었다.


미팅 대신 내가 선택한 것은 독서동아리였다. 1학년 1학기 중간고사가 끝나고 바로 ‘써클’에 가입했다. 당시에는 동아리라는 이름 대신 써클로 불렸다. 민주화를 향한 뜨거운 열기로 가득찼던 그 당시, 비밀 동아리도 많았고 구국을 향한 열망을 실천하고자 하는 동아리도 많았다. 내가 가입한 써클은 교양인문서적을 읽고 토론하는 독서회로 암울한 독재시대를 반영하지 않는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학과에서는 공부를 함께 하자는 소위 말해 ‘운동권’으로 불리는 선배들의 손길이 끊이지 않았으나 나는 학습단체에 소속되지 않았다. 시위에는 매번 참가해서 약간은 운동권처럼 비춰지기는 하나 지식무장은 되지 못한, 운동권이 아닌 시위대의 일원인 사람이었다. 시국을 무관심으로 바라보지 않았으나 정신무장을 위한 공부는 하지 않는, 운동권 선배들을 동경하는, 운동권의 주변을 멤도는 사람으로 자리매김하며 써클 활동을 했다.      

써클 활동을 하면서 나는 여학생들보다는 남학생들과 더 많이 어울렸다. 어린 시절 우리 동네에는 남자아이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들과 어울려 섬머슴처럼 지내서 그런지 몰라도 나는 여자애들과 사소하면서도 알듯말듯한 감정에 휘둘리며 지내는 거보다 남자애들과 어울리는 게 더 편했다. 남자애들과 어울렁더울렁 책 이야기도 나누고 막걸리집에서의 뒤풀이가 즐거웠다.      

 

남자애들과 어울리다 보면 생각지도 않은 문제들이 발생하곤 했다. 자취방까지 따라오거나 자취집 앞에서 기다리는 남학생들이 생겨났다. 나는 이성적인 관심을 보이는 남학생은 그날로 손절했다. 나는 여자친구처럼 다방에서 몇 시간씩 수다를 떨거나 눈내리는 밤 걸리를 서너시간 걸어서 시내에서 자취방까지 와도 이야기가 되는 선배나 후배들과 더 어울리게 되었다.      


물론 나에게도 백미터 인파 속에서도 눈에 띄는, 얼구만 봐도 가슴이 뛰고 얼굴이 달아오는 사람이 있었지만 나는 애써 그런 감정을 외면했다. 나에게 연애는 결혼과 직결되는 그 무엇이었다. 결혼을 하면 내 청춘은, 내 인생은 그날로 끝이라고 생각했다. 결혼은 남자에게 의존하는 삶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나만의 삶을, 나만의 인생을 꾸려보고 싶었다.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독립된 주체적인 여성으로서의 삶을 살고 싶었다.  심지어  ‘남자와 손을 잡으면 결혼해야 한다’는 아주 고리타분한 시골 사람들의 생각을 그대로 물려 받아 연애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다. 그로 인해 연애 감정을 갖지 않기 위해 내 감정을 억누르는, 이성도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스스르를 설득했다. 지금도 이성도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믿지만.       

  

그때는 몰랐다. 연애를 하면서 헤어지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을 만나 사귀면서 관계를 익히고 배워야 한다는 걸. 결국 나는 대학생활 4년 동안 연애 한 번 해보지 못한, 책에서나 연애를 경험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내 감정에 충실하지도 못하고 이성의 감정은 무시하는, 오락가락하는 감정 속에서 방황하는 청춘이었다. 한 선배는 나에게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태도를 지녔다고 비난했다. 평범했던 한 인간이 오랜 시간 노력해서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인 붓다가 될 수 있다는 말이 와전되어 독선적인 사람을 일컫는 말로 쓰인 그 말이 오랫동안 내 마음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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