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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서 Aug 17. 2024

바다 풍경

계획없음의 무지함, 준비 없는 결혼


나는 왜 결혼을 했을까? 이 질문에 앞서 나는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한번도 하지 않았다는 거다. 대학 시절, 연애를 그렇게 두려워하면서도 나는 스물일곱 살 즈음 결혼해서 아이를 세 명은 낳고 싶다고 생각했다. 현대의 3포세대, 7포세대가 들으면 무모하기 이를 데 없는 생각이지만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초등학교 시절에 정부의 인구정책에 부흥하기 위해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포스터를 그리며 자랐고, 오빠, 언니들이 결혼해서 조카들을 두 명씩 낳아 기르는 것을 보면서도 ‘나는 적어도 세 명은 낳을 거야’라는 당찬 포부를 가지고 있었으니 어디에서 오는 자신감이었을까. 5남매가 작은 집에서 복닥거리며 살았던 추억이 내 마음속에 크게 자리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스물일곱 살쯤 결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너무나 막연한 생각이었을 뿐 나는 결혼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사실 나는 결혼이 책임만 늘어나는 거라고 생각했다. 뭐든 내 일은 내가 해야 한다는, 믿을 만한 누군가에게 의존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해 지나치게 독립심이 강하고 책임감이 강했던 탓이다. 그래서 이성이 다가오면 결혼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도망가기 바빴고, 연애는 지금으로 말하면 썸타는 수준에서 줄타기를 했다. 나만의 선을 넘지 않는, 친밀감이 너무 깊어지지 않게, 그 선을 넘는 사람에게는 가차 없이 이별을 선언하곤 했다.  

    

서른 살이 넘어서자 집안 어른들의 인사 말은 점점 도를 넘었다. 종조할아버지는 명절 때마다 나를 보면 “물 좋고, 정자 좋은 곳은 없다”며 덕담아닌 덕담을 하셨다. 모든 것을 만족시키는 남자는 없으니 적당한 남자가 있으면 결혼을 하라며. 어느 날인가는 집에 갔는데 할머니가 팥을 한 주먹씩 쥐어서 마루에 앉아 있는 나에게 뿌리셨다. 피할 겨를도 없이 온 몸으로 날라드는 팥 세례를 나는 준비도 없이 고스란히 맞아야 했다. 붉은 팥은 옛날부터 귀신을 쫓는데 쓰던 곡식인데 내게 귀신이라도 붙었단 말인가. 어처구니가 없어 말도 나오지 않았고, 마음이 착잡했던 기억의 한 장면이 되었다.     

 

그런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는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남편을 처음 만난 것은 서울에서 올라와 서너달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사보 제작 업무를 하던 나는 사진 기자와 강남에 있는 사옥으로 출장을 갔다. 사진 기자는 그곳에 시각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는 동기가 있다며 소개를 시켜주겠다고 했다. 그가 근무하는 사무실에 들어선 순간 나는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바지는 통이 웬만한 여자들의 스커트 폭 정도가 되었고, 노란 머리카락에 귀걸이라니. 지금까지 내가 본 적이 없는 인물이었다. 회사로 복귀하는 길에 사진 기자는 말했다. 디자인 감각이 매우 뛰어난 친구라고. 나에게는 그저 괴상한 친구라는 생각만 남았다.  


두어 달 후 회사에서는 조직개편이 있었고, 그는 홍보팀으로 인사 발령을 받아 광고와 사내 홍보물 디자인 업무를 맡았다. 내가 속한 사보팀은 홍보팀과 같은 실 산하에 있었다. 우리팀에는 사내소식지와 고객대상 월간지를 담당하는 디자이너가 두 명 있었는데 한 명은 그와 동기였다. 우리팀 디자이너들은 월간으로 발행되는 사보가 나오면 그에게 디자인에 대한 의견을 듣곤 했다. 이래저래 그와 자주 얼굴을 보게되었지만 여전히 첫 인상이 강하게 남아 있었고, 동료 이상의 감정은 없었다.      


얼마 후 직원 한 명이 홍보팀에서 사보팀으로 팀 이동을 해 사내 뉴스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는 함께 일했던 그 친구를 잘 부탁한다는 명목으로 사내 인트라넷으로 연락을 해 왔고, 그 후로도 자주 연락을 했다. 가을 등반대회 때는 내 주변을 맴돌며 오고 가는 길에 나와 함께 했다. 그때도 나는 그저 재미있는 친구라고 생각했다.      


당시 나는 회사 근처에서 혼자 자취를 하고 있었다. 서울살이 1년이 되었을 때 갑자기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의료 파업으로 인해 연세학교병원에서 영등포의 한 정형외과 소개를 받고 급하게 수술을 했으나 칠십이 세의 아버지는 혼수상태였다. 2001년 6월 25일 일요일, 친인척들의 방문이 있었고, 점심 무렵 나는 아버지 발의 차가운 감촉을 느꼈다. 그렇게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은 가족 모두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에서 회사는 한창 고객프로모션을 대대로 진행하고 있어서 매일 야근을 해야 했다. 그도 매일 야근을 하면서 메신저로 자주 연락을 해왔다.     


시월의 마지막 날, 대학시절 시월의 마지막 날에는 특별한 일을 한 가지씩 하기로 했던 나는 야근을 하다가 그와 맥주를 한 잔 하게 됐다. 예상은 했지만 그는 나와 사귀고 싶다고 말했다. 서울에서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매일 야근으로 시간을 보내던 나는 “그럴까.”라고 대답을 했다.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그때도 나는 사실 그에게 그렇게 관심이 많지 않았고, 재미있는 친구라는 생각에 한 번 만나보기로 한 거였다. 서른 중반이 넘은 나이에도 사람을 깊이 사귀는 거나 결혼에 대해 별로 생각하지 않고 살던 때였다.       


그와 사귀기로 하고 우리는 회사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이나 회사 사람들이 자주 다니지 않는 골목의 찻집 등에서 가끔씩 만났다. 여전히 주로 메신저로 연락을 주고받았으나 몽글몽글하고 가슴설레는 감정보다 그저 만나는 사람이 있다는 안도감이 있었다. 그러다가 결혼을 고민해야 하는 때가 왔다. 그를 만나기 시작한 지 두어 달이 되었을 때 그는 결혼을 하고 싶다고 했다. 100일을 넘기지 않고 프로포즈를 하고 싶다고. 나에게는 참으로 뜬금없는 소리였지만 나이도 있었고, 또 내가 결혼을 해야 하나하는 고민을 하게 하는 문제가 한 가지 있었다.      


지방에서 같이 근무를 했던 상사가 타부서 임원으로 있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를 위로해 준다는 명목으로 가끔 늦은 시간에 전화를 했다. 술 한잔 하자며. 그 때 든 생각이 ‘만약 내가 결혼을 한 사람이라면 이 시간에 전화를 했을까?’였다. 사회 생활을 하는데 미혼이 걸림돌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상사가 좋은 의도로 전화를 했을 수도 있지만 나는 혼자 사는 여자의 두려움 같은 걸 느꼈다.     


결국 나는 결혼을 결심했다. 그를 깊이 알지도 못했고, 특별한 감정을 느끼지도 않은 상태에서 말이다. 그가 처음 우리집에 인사를 왔던 날, 그와 헤어지면서 ‘이 사람과 결혼을 하는 게 맞나’하는 생각을 강하게 했다. 회사에서도 사람들과의 관계가 썩 원만하지 않은 태도를 보았는데 우리 가족을 만나고 나서 그의 태도와 말이 상당히 거슬렸다. 며칠 동안 심각하게 고민을 했으나 나는 집에 인사도 했고, 앞으로 직장생활을 마음 편하게 하기 위해, 그리고 엄마가 되고 싶다는 막연한 내 꿈을 위해 결혼을 하게 됐다. 결혼식 준비도 그가 주도하는 대로 나는 따라다니기만 했고, 청첩장도 그가 디자인을 했으나 우리집에서는 다시 청첩장을 찍어서 돌리는 헤프닝도 있었다. 그렇게 나는 빛의 속도로 4달 만에 결혼을 해치웠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통과의례 중 하나를 나는 정말 어처구니 없이 시작했다. 결혼이 무엇인지, 결혼 후 어떤 규칙을 가지고 두 사람이 가정을 이룰 것인지, 앞으로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도 없이, 구체적인 계획도 없이 나의 결혼 생활은 시작되었다.     

 

그래서 나의 결혼 생활은 행복했냐고? 아들은 말한다.

“엄마는 결혼을 하지 않고 살아야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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