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라는 그 엄중한 이름
“아가, 반가워! 우리 아기 참 예쁘다. 내가 …….”
아기와의 첫 만남, 내 입에서는 엄마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상하게 ‘엄마’라는 말이 목에 걸려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아 나는 적잖게 당황했다. 뱃속에 있는 태아에게 수없이 되뇌었던 엄마라는 말이 처음 대면하는 아기에게 나오질 않다니. 나는 속으로 ‘엄마’라는 짧은 단어를 여러 번 되풀이하고 나서야 “아가, 엄마야!”라는 말을 할 수 있었다.
요즘처럼 3D로 태아의 얼굴을 볼 수 있었던 게 아니라 상상만으로 그리던 아기의 얼굴을 처음 봐서 생경했던 것일까. 아니면 자연분만의 산고를 느끼지 않고 마취에서 깨어나니 아기가 세상에 나와 있어서였을까. 그것도 아니면 다른 사람들처럼 나에게는 모성이라는 게 없는 것인가. 나는 순간적으로 여러 가지 생각에 마음이 복잡했다. 오물거리는 입, 세상을 처음 바라보는 눈, 얼굴에 비벼대는 손. 꼼지락거리는 아기의 모습에 ‘내가 이 아기의 엄마인가’라는 생각에 잠시 멍했다. 한편 ‘내가 이 아기의 엄마다.’라는 생각과 미묘한 감정에 압도당했다.
만지면 부서질 것만 같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는, 아직은 무력한 한 생명 앞에서 내 마음은 신비함과 막막함의 언저리를 맴돌았다. 엄마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막연하게 엄마가 되고 싶었던 나. 그 막연한 만큼이나 처음 세상 밖으로 나온 아기와 어정쩡한 모습으로 대면하게 했고, 서툴기만 한 나의 엄마역할은 그렇게 시작됐다.
아기는 태어난 지 사흘 만에 황달로 입원을 했다. 아이에게 수유를 하지 못하게 되자 모유는 나오지 않았다. 통증 주사를 중단하자 수술 부위 통증은 심하고, 아기는 입원 중이니 모유에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면회시간을 이용해서 유리창 밖에서만 아기를 잠깐 볼 수 있었다. 강보에 싸인 조금만 아기는 하얀 전등 아래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 어떻게 해줄 수 없는 안타까움과 작은 생명에 대한 안쓰러움은 말로 표현할 길이 없었다.
아기의 황달은 좋아지고, 나도 어느 정도 수술 통증으로부터 조금 회복되어 퇴원 날이 되었다. 일주일 만에 병원 밖으로 처음 나가는 아기의 외출, 한 겨울이라 추위에 대한 준비를 하고 퇴원 수속을 하려는데 아기의 건강 문제로 담당의사 선생님의 면담이 있다고 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신생아에게 건강에 문제가 있다니. 가슴이 터질듯 쿵쾅거리고 머릿속이 하얘졌다. 내 심장소리를 들으며 의사와 마주 앉았다. 의사선생님은 아기의 발톱이 살을 파고드는 내향성 발톱으로 아기 엄지발가락에 염증이 생긴 상태라고 했다. 연고를 잘 발라주고 일주일 뒤 내원하라고 했다. 그나마 다행이었으나 벌렁거리는 심장박동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아기가 불치병에 걸렸거나 큰 수술을 앞둔 부모의 심정은 오죽할까 싶었다.
퇴원해서 2주는 베이비시터에 의존해서 아기를 돌봤다. 산후조리원이 한창 생겨나고 있었으나 나는 집에서 산후조리를 하기로 결정했다. 그 당시만 해도 산후조리원에 가는 산모보다는 시어머니나 친정엄마가 산후조리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에게는 시어머니도 친정엄마도 사정이 여의치 않아 산후도움을 전문으로 하는 베이비시터를 2주간 집으로 오는 방법을 택했다. 베이비시터는 잘 훈련받은 베테랑으로 아기를 안고 씻기는 것부터 식사 준비는 물론 산후 전신마사지까지 척척 해주었다. 2주가 지나고 친정엄마가 올라오셔서 나는 오빠집에서 한달 동안 산후 조리를 더 할 수 있었다. 올케언니 또한 베이비시터 못지 않게 아기를 먹이고 씻기는 일을 잘도 했다.
온전히 혼자서 아기를 돌봐야 하는 시간이 왔다. 친정엄마가 시골집 살림살이를 정리하고 오셔서 아기를 돌봐주시기로 했다. 하루는 분주하게 지나갔지만 한 달이라는 시간은 더디게 흘러갔다. 혼자서 아이를 돌보기 시작한 어느 날부터인가 나는 창문으로 지나다니는 사람을 구경하며 멍하게 서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하루에 한 번씩 아기에게 햇볕과 바람을 쐬기 위해 동네를 한 바퀴 산책하는 것 외에는 사람을 구경할 수 없었다. 회사 근처라 동료들을 집으로 불러 점심식사를 같이 하기도 했지만 혼자 아기를 돌보는 일은 나에게 버거운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기를 바닥에 슬그머니 내려놓고 우유병만 손에 쥔 채 멍하니 아기를 바라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평소에는 아기를 안고 눈을 마주치며 분유를 먹였는데 내 팔에 아기가 없었다. 아기는 분유를 먹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바닥에 누워 분유를 먹는 아기 모습에 나는 몹시 당황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화들짝 놀라 아기를 안으며 이해할 수 없는 내 행동이 미안해서 혼자 울었다.
인사철이니 조기복귀하라는 임원의 전화를 받고 곧 나는 복귀를 했다. 출산 휴가 3개월을 다 채우지 못하고 2주 빨리 출근을 했다. 회사에 복귀해서 출산 휴가 전에 진행하던 프로젝트를 그대로 이어갔다. 출산 휴가를 다녀오면 책상이 빠진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히 들리던 상황에서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다. 내가 진행하는 프로젝트는 창립기념일에 맞춰 출간돼야 하는 회사의 역사를 정리하는 업무였다. 창립기념일이 5월인지라 2월 중순에 복귀를 했으니 시간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동안 수집된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를 하면서 미진한 부분은 직원들 인터뷰를 진행하며 야근이 계속되었다. 일찍 퇴근하면 밤 10시였고, 외부 자문교수를 모시고 하는 업무라 회식이 있는 날은 더 늦기도 했다. 아기를 볼 시간이 없었다. 주말에도 출근하는 날이 잦았다. 매일같이 야근에 주말에도 출근하는 나를 보며 친정엄마는 밤에 아기를 엄마가 데리고 자겠다고 하셨다. 늦게 들어와 잠자는 아기 옆에서 잠만 자는 나는 몸이 피곤하니 새벽에 아기에게 분유를 먹이는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해 결국 아기는 할머니와 한 방에서 먹고 잤다.
나는 무늬만 엄마였다. 아기를 어떻게 씻겨야 하는지도 몰라 늘 어설펐고, 그러다보니 아이를 씻기는 일도 친정엄마와 남편이 주로 했고, 나는 아이와 접촉하는 시간이 부족했다. 가끔씩 아이를 업고 집안을 서성거리는 일이 전부였다. 한번은 엄마를 모시고 시골집에 있는 시장에 갔다가 시장 상인분이 “엄마가 맞냐?”는 질문을 받았다. 아기 업은 모습이 너무 서툴러서 아기가 흘러 내릴 거 같다는 거였다.
아기를 다루는 일에 서툴 때마다 ‘나에게는 모성이 없나?’라며 나 스스로를 의심하게 됐다. 아이와 많은 시간을 함께 하지 못하는 것도 죄책감을 느끼게 했다. 정세랑은 『연년세세』에서 모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한영진은 갓난 아이와의 간격이 조금 벌어진 뒤에야 아이와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아이를 유심이 보고 싶은 마음, 다음 표정과 다음 행동을 신기하고 궁금하게 여기는 마음, 찡그린 얼굴을 가엾고 사랑스럽게 바라볼 수 있는 마음, 관대하게 대하고 싶은 마음, 인내심……. 모든 게 그 간격 이후에 왔다. 한영진의 모성은, 그걸 부르는 더 적절한 이름이 필요하다고 언젠가는 한영진은 생각한 적이 있는데, 타고난 것이 아니고 그 간격과 관계에서 학습되고 형성되었다. 그건 만들어졌다.”
나에게도 그랬다. 아이가 16개월이 되어 ‘저게 뭐야’를 입에 달고 살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의사소통이 될 즈음부터 조금씩 가까워졌다. 아이의 어휘력과 함께 아이의 행동반경이 넓어지면서 비로소 아이가 보이기 시작했다. 엄마라는 이름은 참으로 많은 것을 필요로 한다. 아이가 한 사람의 주체적인 인간으로 서도록 끊임없는 관심과 돌봄을 해야 한다. 신체적 정서적으로 건강한 독립 주체가 되도록 지켜보는 일은 기쁨과 인내를 동반한다. 시간과 공간을 함께하며 가족이 되어간다. 아이가 성인이 된 지금, 나는 아직도 엄마 역할이 제일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