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만나지 못하지만 그들이 있어 행복했네.
몇 해전 대전에서 유치원감을 하고 있는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중학교 동창모임에 나갔는데 나에 대해 궁금해하는 친구들이 있다며 동창밴드에 나를 초대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어서 그러라고 했다. 그 후 매달 동창회를 맡고 있는 회장에게 문자가 온다. 매월 1일마다 안부 문자가 오고 경조사를 알리는 문자, 그리고 매년 6월에 1박 2일 모임을 알리는 문자가 온다.
밴드에 가입되고 몇 명의 남자 동창들에 연락이 왔다. ‘잘 사느냐’는 안부전화였다. 수십년의 세월이 흘러 안부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훈훈했다. 하지만 나는 친한 친구 몇몇 외에는 왕래가 없던터라 동창모임에 가지 않는다. 관계는 언제나 만나고 헤어짐의 연속이기에 나에게는 그 시절 추억만으로 충분하다.
초등학교 때 내 친구는 주로 옆동네 사는 아이들이었다. 우리 동네에는 내 또래 여자아이가 없어 나는 옆동네 아이들과 같이 집으로 오곤했다. 수업이 끝나면 운동장에서 공기놀이를 한다. 여기저기에서 주워모은 공기돌이 없어지면 안되니 집에 올 때는 나무 아래에 모래로 덮어서 공기돌을 숨겨둔다. 집에 오기까지 중간에 한차례 더 논다. 우리들이 ‘구렁텅이’라고 불렀던 그 곳은 산 사이에 있는 평지로, 위에서 보면 가파른 내리막길을 지난 곳이고, 아래에서 보면 가파른 길을 오르기 전에 있는 평지라서 그곳에서 고무줄 놀이를 하고 집으로 향한다. 겨울에 눈이 내리면 내리막길은 매우 미끄러워서 길가의 산자락과 연결된 부분을 찾아 내려가야 했다. 당시에는 네모난 체크무늬의 보온 도시락이 엄청 커서 보온 도시락을 타고 내려가기도 했다. 어린 마음에 어려움을 모르고 살던 시기에 만난 그 시절 친구는 같이 놀 수 있으면 모두가 친구였다.
5개의 초등학교 졸업생이 모이는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좀더 다양한 친구들을 만났다. 타 학교 출신의 아이들은 낯설면서도 관심의 대상이었다. 우리 학교 출신이 가장 많았지만 통학버스나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아이들이 사는 곳은 얼마나 먼 거리인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7명의 친구들과 몰려 다니며 놀았는데 우리는 교문 앞에서 헤어져야 함에도 하교를 같이 했다. 쉬는 시간에는 개구멍을 통해 학교 앞 가게에서 군것질 거리를 사다가 수업시간에 몰래 먹었다. 선도부방이었던 나는 동조를 하면서도 ‘이래도 되나.’하는 마음에 약간의 죄책감도 들었다. 남녀공학이라 이성에 관한 대화를 주로 했고, 7명은 각자 다른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중학교 때 가장 친했던 친구와는 한 번도 같은 반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친할 수 있었을까. 그 친구는 딱 맞는 교복을 입은 나하고 친구가 되고 싶었다고 했다. 나는 그 친구의 새 교복이 부러웠는데. 나는 언니 교복을 물려받아 검정이 아닌 붉은기와 회색기가 도는 색바랜 교복을 입었다. 그 친구와는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치러 갔을 때도 같은 여관에서 묵었다. 배정 받은 고등학교가 달랐지만 타지에서 한 달에 한 번 정도 만났다. 그 친구의 하숙집은 ㄱ자 모양으로 긴 마루에는 유리창이 있었고, 마루를 따라 방들이 칸칸이 있었는데 우리 자취집보다 쾌적했다. 레이스 커튼으로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은 친구의 하숙방에서 성적 이야기를 할 때면 사뭇 진지했지만 대부분은 별 것도 아닌 이야기들로 즐거웠다. 대학교 때는 그 친구에게 미팅도 주선해주었다. 상업고등학교 선생이었던 친구는 결혼해서 남매를 두었는데 안타깝게도 40대 중반에 유방암이 재발해서 생을 마감했다. 그 친구와 만나지 못한지 서너해가 되었을 무렵이었다. 시부모님을 모시고, 직장인으로, 두 아이의 엄마로, 이런저런 일을 하며 안정적인 직업이 없었던 남편과 사느라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탓일까. 차분하고 깔끔한 성격에 처한 상황이 쉽지 않았을 텐데 얼마나 힘들었을까. 친구는 이제 휴대전화 번호 목록에도 이름이 없다. 하지만 그 친구는 내 기억속에 영원히 살아있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만난 친구들은 정말 다양했다. 대전의 토박이 친구들도 많았지만 논산, 서산, 태안 등 충청도 각지에서 모인 친구들이 있었다. 지역이 다양했던 만큼 우리는 사투리 때문에 자주 웃음보가 터지곤 했다. 논산 친구가 ‘대간하다’고 말하면 대전 친구들은 무슨 소린가 어리둥절해했다. ‘베랑박’ 또한 우리들의 주요 이야깃거리였다. 지방에서 모인 친구들은 하숙을 하거나 자취를 했는데 당시 집들은 대부분 허름했고, 연탄을 피우던 시절이었다. 방바닥만 따뜻하고 벽은 차가웠다. 누군가가 ‘베랑박에 기댈 수 없어’라는 말을 하면 문맥으로 짐작하는 친구들도 있고,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는 친구들고 있었다. 다양한 친구들을 만나며 우리 자취방은 친구들의 사랑방이 되곤 했다. 좁은 방에 대여섯명이 모여 숙제를 한다고 비비적 거렸다.
고등하교 2학년 때 짝꿍과는 각별한 사이였다. 서산에서 온 친구였지만 사촌오빠들이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어서 서울 소식을 빠르게 알고 대학 정보도 많이 아는 친구였다. 쉬는 시간이면 앞 시간에 배운 내용을 중얼중얼 외우는 친구를 보며 나는 충격을 받았다. 쉬는 시간이면 화장실에 여기저기 다른 친구들 자리에서 떠들던 나와는 차원이 달랐다. 사실 나는 공부하는 방법도 잘 몰랐고, 숙제만 하고 시간내서 공부를 따로 하지 않는 학생이었다. 그 친구는 학교 앞에서 중학교 때 친구와 자취를 하다가 하숙을 했는데 그 친구를 좋아하는 다른 친구들이 많아서 나는 친구 쟁탈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곤 했다. 왜 그런 상황이 벌어지는지도 모른 채 나는 친구를 빼앗아 간 아이가 되곤 했다. 결국 다른 친구들과는 다 연락이 끊기도 그 친구와 나는 재수해서 같은 대학에 입학했고, 같은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1년의 짧은 시간이었다. 전공에 취미가 없었던 친구는 두 학기를 연속으로 학사경고를 받아 학교를 떠났다. 결국 본인이 좋아하는 영어 공부를 위해 서울에서 대학을 마치고 초벌 번역일도 하며 직장생활을 하던 친구는 결혼 후 미국으로 이민갔다. 늘 각박한 생활을 답답해했고 우리나라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싶지 않다며 결혼 직후 떠났다. 주관이 뚜렷했고 삶의 방향성이 명확했던 친구는 10년 전에 어머니 생신을 맞아 한 번 한국에 왔다. 가끔씩 톡으로 안부를 주고 받지만 많이 보고 싶은 친구다.
이제 중고등학교 시절의 친구는 내 주위에 거의 없다. 중학교 친구 중에는 단 한명의 친구와 연락하고 얼굴보며 살고 있다. 고등학교 친구들은 몇 해전 모임 이후로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 미국에 있는 친구와 안부만 주고받을 뿐. <명랑한 은둔자>에서 캐럴라인은 “친구 관계에 작별을 고할 때를 아는 것은 계속 이어갈 때를 아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다.”라고 썼다. 내가 원하지 않아도 작별을 하게 되는 친구도 있고, 별일 아닌 일로 이해받지 못해 관계가 끊기도 하고, 일상의 관심사에 공통점이 없어 멀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에서 만난 친구들의 관계 속에는 내가 있고, 그들이 있고, 우리가 있다. 성장기에 만난 그들은 나를 만드는 자양분이었고 성인으로 가는 길목에서 함께 했던 시간만으로도 충분한 징검다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