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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서 Jul 06. 2024

사람 풍경

네가 언니라고 부르면 어색해

 

세 살 터울인 둘째 언니. 나는 어린 시절부터 언니라고 불러본 기억이 없다. 언니가 내 기억으로 들어온 때가 언제였는지도 정확하지 않다. 태어나 보니 나는 넷째이자 딸로는 셋째였다는 사실 뿐.      


어린 내 눈에 보인 언니는 나보다 약한, 키도 작고 덩치도 작아서 항상 만만한 상대였다. 나는 언니라는 호칭 대신에 “야”, “너”였다. 물론 부모님 앞에서는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언니가 밖으로 놀러 나갈 때는 어떻게든 악착같이 따라다녔다. 우리 동네에는 내 또래 여자애들이 없었고, 언니 또래는 세 명이나 있었고 언니보다 한 살 위의 당고모도 있어서 언니는 여자 친구가 많아 보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 때까지 내가 기억하는 언니에 대한 에피소드는 주로 집안일을 서로 미루며 다투었던 일이다. 아침저녁으로 청소해야 하는 상황에서 방을 쓸고 요강을 비우는 것과 걸레질하는 일을 놓고 실랑이를 벌였고, 우리는 가위바위보를 해서 이긴 사람이 먼저 할 일을 선택하곤 했다. 이상하게 가위바위보에 이겨서 먼저 선택해도, 져서 나머지를 해야 할 때도 마음은 찜찜했다. 뭔지 모르게 언니에게 내가 당하고 있다는, 언니는 언제나 뺀질거린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사실 집안일이나 밭일할 때 힘쓰는 일은 내가 더 많이 했던 거 같다. 언니는 힘든 일은 못하지만 꾀가 많은 아이로 집안 식구들이 인정했고, 나에게는 닥치는 대로, 특히 힘이 필요한 일을 많이 시켰다. 어른들의 칭찬에 따라 춤추던 나는 동네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오는 물지게까지 지었을 정도였다. 우리 집은 지대가 높아서 샘물을 끌어 올리기까지 꽤 긴 시간이 걸렸고, 마중물을 넣고 펌프질할 때도 힘이 필요해서 내가 많이 했던 거 같다. 물론 착각일 수도 있겠다. 내 기억은 내 마음대로 저장됐으니까.       


그렇게 언니와는 늘 뭔가 모를 경쟁이 있었고, 머리채를 잡고 싸우기도 했다. 어느 날은 싸우다가 할머니에게 잡혀서 우리는 등을 댄 채 마루 기둥에 묶이는 일이 있었다. 등을 대고도 발을 구르며 서로 너 때문이라며 싸웠다. 엄마 아버지는 밭일로 바쁘셨고, 할머니는 우리의 싸움에 특단의 조치를 취한 거였다. 얼마나 싸웠으면 그렇게까지 했을까. 동생에게 힘으로는 상대를 할 수 없었던 언니는 그 화를 어떻게 삭였을까.      


내가 중학교 2학년 때로 기억한다. 언니들이 읽는 ‘사랑의 체험수기’ 같은 책을 몰래 훔쳐 읽던 때, 나는 언니의 일기장도 훔쳐보게 됐다. 자물통이 달린 일기장이 유행하던 시절이었지만 언니의 일기장은 책상에 있었다. 언니의 일기장에는 엄마에 대한 원망이 가득했다. 큰언니와 둘째 언니가 싸우면 언니랑 싸운다고 자기만 혼내고, 나와 싸우면 동생과 싸운다고 자기만 혼낸다는 내용이었다. 엄마의 불공평과 자기는 천덕꾸러기 같다는 내용의 일기는 나에게 꽤나 충격이었다. 나는 언니와 싸우는 일을 멈췄다. 가출이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되었고, 미안한 마음이 컸다. “야”, “너”라는 호칭도 쓰지 않았다. 언니를 부르는 일이 없어졌다.       


그렇게 중학교 시절을 보내고 나와 언니는 집을 떠나 자취 생활을 하게 됐다. 우여곡절 끝에 대학에 입학한 언니와 고등학교에 진학한 나, 둘만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우리 자취방에는 언니 친구들이 제 집처럼 드나들었다. 같은 과 친구들과 동아리 친구들이 수시로 놀러 왔고, 나는 덕분에 고등학교 때부터 다방을 다닌 이력을 갖게 됐다. 언니의 대학 생활 4년을 옆에서 지켜보며 나는 언니의 대학 생활이나 연애사까지 속속들이 알 수 있었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되면서 외사촌 언니와 같이 살게 됐다. 나보다 한 학년 위였던 외사촌 언니가 대학에 진학하면서 있을 곳이 마땅치 않아 함께 지내게 된 거였다. 둘째 언니는 대학교 4학년으로 졸지에 도시락을 세 개씩 싸야 하는 엄마가 되었다. 내 도시락 두 개, 외사촌 언니 도시락 한 개. 외사촌 언니는 검소해서 대학생인데도 도시락을 싸서 다녔다. 손빨래를 하던 시절, 언니는 내 빨래까지 다 하고, 청소도 잘해서 자취방은 늘 깔끔한 상태를 유지했다.      


언니가 대학교 4학년이 되었을 때는 동생까지 고등학교에 진학해 4명이 살게 됐다. 재수하는 나, 외사촌 언니, 동생까지. 그 작은 몸으로 어떻게 아침마다 4개의 도시락을 쌌을까 참 대단한 언니였다. 반찬은 주로 어묵과 두부, 멸치와 콩나물이었지만 4개의 도시락 반찬을 만들어야 하면 그 양도 만만치 않았을 텐데 나는 그걸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다. 언니의 대학교 4학년은 그렇게 도시락과의 전쟁을 치르며 보냈고, 그 와중에도 언니는 장학금을 타며 학교에 다녔다.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한 언니. 그러나 취업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아서 쉽게 취업이 되지 않았다. 교원자격증이 있었던 언니는 사립학교 교사 자리를 교수로부터 추천받았으나 우리 집 형편에 기부금을 낼 수 없어 그 자리는 물 건너갔다. 당시만 해도 여자들이 대학을 졸업하면 추천으로 직장을 구하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시골 출신인 언니는 시골 동네에서 여자애가 처음으로 대학에 다닌다는 부담만 있었을 뿐 취업에는 문외한이었다.      


언니가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위해 방황하던 그 시절, 나는 대학교 1학년이었다. 언니는 혼자 힘으로 취업을 위해 고군분투했으나 상처만 안은 채 서울로 갔다. 오빠 집에서 직장에 다니게 된 것이다. 언니가 상경하기까지, 일 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많은 불안을 안고 살아야 했다. 언니가 위태로워 보였고, 언니의 상태를 지켜보며 몰래 나름대로 언니의 문제를 해결하기도 했다.  재수해서 겨우 들어간 대학교 1학년을 그렇게 보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친구 집으로 가출도 했고, 언니가 학교로 찾아오는 일련의 일들이 있었다. 재수생이라는 라벨을 붙이고 고등학교 후배들이 많은 학과에서 ‘언니’라 불리며 쪼그라든 자존심으로 생활하느라 힘들었는데 언니의 일로 참 마음 복잡한 1학년을 보냈다.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던 언니는 대학교 같은 과 동기인 지금의 형부와 스물일곱 살 때 결혼했다. 형부의 오랜 구애가 있었고 언니는 결혼과 함께 시골에서 공무원의 아내로 살게 됐다. 나는 언니 집에 자주 갔다. 지금도 자주 간다.      


언니는 말한다. “네가 언니라고 부르면 아직도 어색해.”라고. 사실 나는 지금도 면전에서 언니라고 부르는 일이 흔치 않다. 호칭을 빼고 대화하는 게 너무 익숙해져서 부르지 않는다. 언니는 지금 나에게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다. 언니 대접도 못 하고 살았는데 언니는 역시 언니였다. 핏줄을 나눈 사이, 나이가 들어갈수록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기억으로 친구처럼 살아간다. 눈물과 한숨과 방황을 공유한다는 건 인생의 일부에 녹아 흐르는 끈적함과 함께 내 일부임을 새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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