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의 죽음을 보며
아이는 친가에서도 외가에서도 막내였다. 집안에서 오랜만에 아기를 본 친인척들은 아낌없는 사랑을 주었다. 아이는 웃을 때면 반달이 되는 입모양으로 보는 사람을 기분 좋게 했고, 또박또박 말을 잘해 사람들은 아이에게 자꾸 말을 시키며 박장대소했다. 무엇보다 천진난만한 아이 특유의 밝음은 보는 사람을 기분 좋게 했다. 물론 이것은 아들 바보 엄마의 생각이다. 외할머니의 지극정성으로 아이는 엄마의 부재를 느끼지 못하며 맑고 밝았다.
동생의 발병, 위험한 선택
아이가 여섯 살 되던 해, 친정엄마가 갑자기 시골로 내려가셔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나와 남편이 어느 정도 아이를 돌보며 어린이집에 등원시킬 수 있는 정도는 됐으나 할머니와 워낙 밀착관계에 있던 아이에게 할머니의 부재는 어려움이 많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동생에게는 ‘루푸스’라는 병이 있었다. 루푸스는 만성신부전증을 일으키는 병으로 치료가 어렵다고 알려져 있다. 온몸이 부어올라 입원을 했는데 루푸스라는 병명을 듣고 동생은 정신적으로 쇼크 상태가 되었다. 30대 중반에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동생은 피해망상 증상까지 보였다.
어쩌다 누나집이라고 가끔씩 찾아와서는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이상한 소리를 하곤 했다. ‘옆집 아저씨가 자기를 죽이려 한다’며 옷 속에 신문지로 싼 칼을 품고 있기도 했다. 다섯 살 아이가 옆에 있는 것이 위험해 보일 정도였다. 요양처를 알선해 줘도 우리 집에 한 번씩 다녀가면 동생은 병원이나 요양처를 옮겨 다니며 엄마가 시골집에 내려가 돌보는 것은 마다했다. 그 정신에도 우리 아이를 돌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대전에 있는 성모병원에서 투석을 받으며 생활했고, 상태는 점점 악화되어 결국 집으로 오게 된 거였다. 친정엄마는 동생을 돌보기 위해 시골로 내려가셨다.
모든 것을 친정엄마에게 의존하고 살던 우리 가족은 한동안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아침에 아이 등원은 남편이 시키고 저녁에 하원은 내가 맡아서 했다. 일이 밀려 퇴근이 늦어지면 어린이집에 전화를 하고 아이는 어린이집에 혼자 남아있기 일쑤였다. 아이는 혼자서 선생님과 지내는 시간이 좋았던지 늦게 데리러 가도 싱글벙글 웃으며 나를 대했고, 혼자만 독차지하는 놀이터에서 이 기구 저 기구를 타며 놀다가 집으로 왔다.
동생의 죽음과 그 무거움
그러던 어느 날 오전 11시경 이었다. 오전 업무에 한창인 시간이었는데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와 겹쳐 엄마의 다급한 목소리가 휴대폰을 통해 들려왔다. 동생이 위급해서 병원으로 이동 중이라고 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며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이 순간적으로 멎었다. 머릿속은 하얗고 심장은 걷잡을 수 없게 뛰었다. 급하게 휴가를 내고 아이를 데리러 어린이집에 갔다. 아이의 손을 잡고 집에 오니 눈물이 주르륵 주르륵 계속 흘러 한참을 앉아 있었다. 엄마의 우는 모습을 본 처음 본 아이는 “엄마, 개구리 삼촌 많이 아퍼?”라며 불안해했다.
시골로 내려가는 동안 비가 많이 내렸다. 내 눈물을 대신해서 내리는 것처럼 주룩주룩 내렸다. 어린 아이를 병원에 데리고 갈 수가 없어 우선 공주에 사는 언니 집으로 갔다. 비는 억수로 내리고 나는 동생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아이를 핑계로 병원에 가지 않았다. 그 때 병원에 가지 않았던 게 지금도 마음에 많이 걸린다. 밤늦게 잠깐 정신이 들었다는 연락을 받았으나 동생은 결국 새벽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아이의 눈에 비친 오열하는 할머니
다음 날 아침, 장례식장에 도착하니 엄마는 실신 직전이셨다. 늘 강인함으로 우리를 지켜주던 엄마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촌로가 되어 계셨다. 영안실에 마련된 방에서 오열하는 할머니를 본 여섯 살 아이는 “할머니,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할머니도 하늘나라 가면 외삼촌 만날 수 있어요.”라고 말했다. 친정엄마는 외손주를 끌어안고 더욱 오열하셨다. 장례식을 마치고 오빠 집에서 며칠을 지내신 친정엄마는 다시 시골로 내려가셨다. 우리는 여전히 아이와의 등하원 전쟁을 치르며 일상을 사느라 바빴다.
친정엄마는 겨울을 지내시기 위해 우리 집으로 다시 오셨다. 겉보기에는 아이를 돌보느라 여념이 없는 듯 보이셨지만 우리 집은 무거운 공기가 흘렀다. 누구도 동생에 대한 말을 꺼내지 않고 서로 눈치만 봤다. 동생의 병이 더 이상 호전은 어렵고 신장의 기능이 거의 안 되는 상태였지만 엄마가 시장에 가진 사이에 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기에 누구도 동생의 죽음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자살 가족이라는 멍에가 생각보다 무거웠다. 나는 ‘차라리 잘 됐다. 그렇게 아픈 상태로 사느니.’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남은 사람은 생각도 하지 않은 무책임한 녀석’이라는 원망도 했고, 내 마음속에는 자살 가족이라는 수치심이 자리했다.
아이를 통해 동생의 죽음을 마주하며
햇볕이 창문을 통해 따스하게 내리쬐고 푸른 하늘에 하얀 구름이 뭉개 뭉개 떠가는 어느 봄날, 거실 소파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던 아이가 갑자기 소리쳤다.
“엄마, 저기 하늘에 떠가는 구름이 개구리삼촌 같아!”
순간 우리 집은 얼음이 됐다. 그동안 누구도 꺼내놓지 못한 동생 이야기에 나와 남편은 움찔했고 멈칫멈칫 어찌할 줄 몰랐다. 동생의 죽음 이후 몇 개월 동안 동생에 대한 말을 일체 함구하고 살던 우리는 당황했다. 아이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나는 “그래, 삼촌은 저렇게 자유로운 것을 좋아했어. 하늘나라에서 저 구름처럼 살고 있을 거야.”라고 말해 주었다.
성당에 가서도 동생의 모습과 비슷한 사람을 보면 아이는 “엄마, 개구리 삼촌 닮은 사람이 있어.”라며 큰 소리로 말해 우리 부부를 당황하게 했다. 아이에게는 삼촌이 생생한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아이의 삼촌에 대한 기억들로 인해 나는 조금씩 동생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었다. 일 년여 동안 나는 꿈속이나 생활 속에서 침습하는 동생 생각에 고통 받고 있었다. 나와 세 살 차이인 동생은 나의 고등학교 시절 3년을 제외하고는 20여년을 함께 살았던 터라 나의 마음속에는 동생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이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동생의 죽음 앞에서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던 거며 동생을 떨쳐버리고 혼자 서울로 올라왔고, 결혼을 핑계로 동생을 돌보지 않았다는 미안함과 죄책감이 내 안에 묵직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아이의 갑작스런 외삼촌에 대한 이야기들은 나에게 동생 생각을 하도록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아이의 말로 인해 엄마와 동생에 대해 말할 수 있었고, 언니들과도 동생에 대한 추억을 나눌 수 있게 됐다.
아이의 감정을 살피지 못해
아이로 인해 점차 동생에게서 나는 자유로워져 갔는데 정작 아이에게 죽음과 이별, 슬픔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못했다. 친정엄마에게는 아들의 부재, 나에게는 동생의 부재였는데 그 상황에 대해 제대로 설명을 해주지 못했다. 할머니의 오열과 엄마의 눈물을 처음 본 아이의 마음을 살펴주지 못했다. 서른 살이 넘은 삼촌이 조카 앞에서 개구리처럼 팔짝팔짝 뛰며 잘 놀아주어 ‘개구리 삼촌’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외삼촌의 죽음에 대해 아이에게 물어보지 못했다. 나의 혼란스런 감정을 다스리는 거조차 미숙했던 나는 아이의 마음을 살펴줘야 한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아이에게는 처음 경험하는 죽음이자 다시는 볼 수 없는 외삼촌과의 이별이었는데 아이의 마음에 대해 생각하지 못했다. 그때의 감정이 어떠했는지 물어봐주고 감정을 충분히 말하도록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게 못내 마음에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