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자존감'이란 말이 대중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아마도 심리학이 유행하기 시작한 근 10년 내외의 일일 것이다. 사람들은 지금, 현재 인간관계에서 겪는 많은 어려움의 원인을 심리학에서 찾으려 했고, 그 안에서 진주처럼 하나의 핵심 단어를 찾아냈다. '자존감'
이 모든 게 내가 자존감이 낮아서 그런 거구나.
나 역시 이 단어에 몹시 꽂혔다. 모든 분쟁과 괴로움, 불안과 우울을 명쾌하게 설명해주는 단어처럼 보였다. 그리고 화살은 내 자존감을 일찌감치 키워주지 못한 내 부모에게 쏠렸다. 자존감을 사람들이 많이 받아들인 데에는 또한 희망적인 여지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부모로부터, 어릴적 생성돼 내 인생을 좌지우지하지만-- 그럼에도 성인이 된 지금 다시 내 자존감을 높일 수 있다는 것. 와. 아직 희망은 있다! 나도 온전한 인간으로 잘 살 수 있겠다! 자존감을 보며 의지를 불태운 순간들이 있었다.
그래서 육아 중인 부모들은 특히 이 자존감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내가 경험한 걸 내 아이가 경험하지 않길 바라기 때문이다. 자존감이 다치치 않도록 아이에게 되도록 화내지 않고 타이르려 하고, 자존감을 높여주려고 칭찬도 많이 하고 그 의견을 존중해주려 노력한다. 자존감만 잘 만들어줘도 내가 할 일의 상당부분을 잘 해낸 거라 생각하니까.
그러나 언제나 사람들의 희망과 불안을 볼모삼아 자기 주머니를 채우려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게 아이의 자존감은 아주 좋은 아이템이었다. "어머니, 우리 ㅇㅇ이 자존감이 낮아지면 안되잖아요?" "아버님, ㅇㅇ이가 자존감 높은 아이로 크려면 이걸 하셔야 해요."
책도, 학원도, 유치원도, 심지어 영상물들도 까딱하면 자존감을 말한다.
지난번엔 기가 막힌 뉴스를 봤다. 아동복 디자이너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
"나중에 다 커서 어릴 때 사진을 보고,
엄마가 날 이렇게 멋진 옷을 입혀 키웠구나 하며
자존감이 높아질 수 있도록..."
듣는 순간, 속에서 뭔가 꿈틀 했다. 내가 그 옷을 사입히지 못해서 난 화가 아니다. 사람들이 지푸라기 잡듯 매달리는 자존감이란 단어를 저렇게 쓰다니....
예쁜 옷 입혀 높아질 자존감이라면, 세상에 자존감 낮은 채로 살 사람은 없다. 정말 아이러니컬한 건, 옷 따위에 좌지우지되는 것 자체가 자존감이 낮다는 증거라는 점이다.
어릴적 자존감은, 부모의 전폭적인 사랑과 믿음에 기반한다. 아이가 애써 찾지 않아도, 주의를 기울여 느끼려 하지 않아도 보호자의 사랑과 믿음을 느낄 수 있고, 그 감정이 아이 마음에 내재화됐을 때 비로소 굳건해지는 게 자존감이다.
"엄마의 사랑을 예쁘게 입힌 옷에서 느낄 수 있어요" 라고 말하고 싶은가? 부모의 사랑은 옷을 홀딱 벗겨 키우더라도, 무언으로, 이심전심 알 수 있는 무엇이다. 눈빛, 손길, 표정, 행동, 억양와 말투 그 말 안에 들어있는 나에 대한 사랑과 관심. 이런 것들 말이다.
"6살에 입학해도 괜찮아요. 그런데, 6살에 입학하면 이미 5살에 입학해 1년을 영어로 말한 친구들과 섞이잖아요? 그럼 우리 ㅇㅇ이 자존감이 낮아져요."
이렇게 입학상담을 하는 영어유치원도 마찬가지다. 원장이 말한 그런 경험이 결코 '긍정적이지 않다'는 건 분명하다. 아이는 분명 처음엔 주눅들고, 불편하고- 유치원에 가기 싫다고 느낄 것이다. 그렇다고, 5살에 입학해 영어를 잘 하는 아이들의 자존감이 높다-고 일반화할 수 있는가. 상담 부모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것 말곤 아무 영향력이 없는 확신이다. 이 것 역시, 내가 우리 아이 영어유치원에 보내지 않아서 하는 말은 아니다. ㅋ
이런 말들이 자꾸 나를 불편하게 한다. 그리고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려 이렇게 또 글을 쓰게 한다. 그리고 글을 마무리지을 즈음엔 상술에 흔들리지 말고, 이따 아이 하원할 때 엄마가 보고싶었다고 말하고, ㅇㅇ이 덕분에 엄마 일 열심히 하고 왔다고, 빨리 집에 가서 맛있는 간식 먹고 아빠 오면 김이랑 콩나물국이랑 해서 밥먹자며 꼭 안아줘야지- 라고 다짐하게 한다.
자존감에 목매는 사회, 사람들의 불안한 마음을 건드리려 자존감을 들고나와 자기 소득을 높이려는 사람들. 현혹되지 말자, 상술 안에서 자존감을 찾을수록 내 자존감, 내 아이의 자존감이 흔들린다는 걸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