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책을 쓰고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브런치 들어와서 뜬금없이 무슨 말인가 싶겠지만, 결혼 전, 한 해 여름휴가를 통으로 제주도 구석에 있는 하루 4만원짜리 호텔(이라 쓰고 거의 모텔에 가까운) 5박6일을 예약한 적 있다. 여기에 틀어박혀, 랜터카 없이 버스타고 제주 시내에 두어번 다녀온 걸 제외하곤 호텔 방과 그 앞 파스꾸찌 카페에 앉아 글만 썼었다.
'그림 그리고싶어지는 책'이라는 가제를 정해놓고, 그림을 잘(똑같이? 서양미술의 원리에 의거해, 그럴듯해 보이게) 그리는 방법을 내 나름의 비유와 설명으로, 예시그림까지 잔뜩 그려 넣은 초고를 썼다. 목차를 정리하니 18개 글감이 나왔는데, 그걸 1강씩 쓰다보니 5박6일동안 9강까지 쓸 수 있었다.
한글파일에 곱게 앉힌 그 글을, 마침 출판사에서 일하는 친구가 듣더니 내놓으라 해서 출판사 예술담당 편집자에게까지 전달됐다. 그리고 호된 지적질이 가득 담긴 메일을 회신받았다. 몹시 자존심이 상한 나는 그 메일 후 더 이상 초고를 진행시키지 못한 채 그대로 나의 야심찼던 프로젝트를 접었다. 쓰다 만 9강짜리 초고는 아직도 내 컴퓨터 바탕화면 맨 구석에 폴더로 남아있다.
그 사이 일(한답시고 바쁜 척)한다고, 결혼하고, 임신하고, 일 그만두고는 코로나라고(코로나와 원고 집필이 도대체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지만), 애 낳고는 애 키운다고 그 원고는 내 안중에서 아예 사라졌다. '언젠가 내 책을 써서, 그 책을 기반으로 직장인을 때려치고 자유롭게 살리라' 하던 꿈이 꿈으로 끝났다고 생각했다. 경단녀에서 다시 일을 시작하고, 그보다 더 일이 많은 회사로 이직하고, 그때부터 시작된 빡세고, 생각할 일이 많은 업무가 몰아치면서 내 인생도 이렇게 그냥 흘러가나보다 했다. 이 삶도 괜찮다 생각한 것 같다. 굳이, 이 책 많은 세상에 내 개인 소견을 한 권 더할 필요는 없지 않나. 사람들이 책으로 그림을 배우려고 하겠어? 내가 설명을 잘 하고 그림을 잘 가르쳤던 건 사실이지만 이미 10여년 전의 일이고, 지금 미술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 니즈는 또 다를테니까. 지금도 괜찮지 뭐. 하면서 딱히 아쉽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젯밤 이 글을 보았다. 내가 지금 일하는 회사는 약국체인인데, 체인본부에서 회원 약사들에게 블로그 글쓰기를 독려, 교육, 유도하는 중에 어떤 낭중지추, 군계일학 같은 약사님의 글이었다. 충격적인 건 여기에 내가 등장한다는 사실이었다.
"이사님, 김 약사님 포스팅을 꼭 읽어보셨음 합니다 +_+ 제가 등장해서 꼭 추천드리는 건 아닙니다." https://m.blog.naver.com/sunaebompharm/223974569177 라며 팀에도 공유했다.
글을 다 읽고, 어떤 댓글을 달아야 할지도 황송해 가슴이 두근거렸다. 잠이 오지 않았다. 나에게, 제대로 내 글을 쓰지 않은 지 오래된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이렇게 글로 남겨주시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소냐. 그러면서 이제는 없다 생각했던 글쓰기에 대한 열망이 되살아났다. 실로 십몇 년 만에.
이 곳 약국체인에서 나는 기자를 때려치고 홍보일을 하고 있다. 이제는 기자도 아니니, 이 브런치 닉네임도 바꿔야겠지. 기자로는 15년 가까이 일했지만 홍보는 처음인 나에게, PR과 글쓰기 전문가인 상사들은 계속해서 홍보를 가르치고 수정시키고 또 가르친다. 나이 마흔넷에 새로운 일을 배우는 게 힘들법도 하지만, 요즘 어느 회사에서 사람을 가르쳐서 쓰겠느냐. 요즘 이런 회사가 없다. 게다가 나이도 많고 애 딸린 나에게 이렇게 공을 들여주시니 나도 열심히 배워 1인, 2인, 3인의 몫을 얼른 해내고 싶은 마음이 크다. 그래서 디스크 터지도록 앉아 계속 배우고 일하고 일하고 배우고 있다.
상사 중 PR 전문가가 나에게 항시 하시는 말씀이 있다. 내가 짠 홍보글, 메시지, 배너 문구, 블로그와 인스타 글을 보며 하시는 말씀이다.
"정 차장, 사심이 들어가선 안돼. 그럼 무조건 망이야. 마가 끼거든. 사심을 버려."
처음은 내가 '문장에 넣었다는 사심'이 뭔지도 알 수 없었다. 더 많이 보게, 더 많이 클릭하게, 더 많이 모객하려고 쓴 문자 한 줄에 무슨 사심이 있다는 건지도 몰랐다. 그런데, 어젯밤 김 약사님의 저 글을 읽고 나서 오늘 일어나 출근준비를 하는데 벼락처럼 머리를 때리는 문장이 있었다. "사심을 버려."
내가 쓴 - 그림그리고싶어지는 책-은 사심으로 가득했다. 사람을 '가르치려는 의도'가 너무 빽빽하게 들어차 숨이 막혔다. 이번에 글쓰기 강의를 새삼 준비하며, 예전에 내가 썼던 9강 중 하나를 골라 읽어보니, 무슨 - 심짐어 교주도 아닌 - '교조님의 가르침'같은 문장이 가득했다. 아... 여기부터 마가 잔뜩 꼈구나. 이러니 안됐지. 그 편집자분이 읽으며 얼마나 거부감이 들었을까. 책으로 출간되지 않은 게 오히려 다행일 정도였다. 이런 숨막히게 꼰대같은 글을, 도대체 어떤 출판사가 돈들여 출간해주겠어.
이런 글을 써놓고, 자랑스러워 하며 편집자에게 보내놓고, 피드백이 좋지 않다고 심술을 내고, 실력이나 인사이트는 하나 없이 콧대만 높았던 과거의 누군가가 보였다. 거진 8년 만에,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창피했다. 옛날의 그 회신 메일을 찾아 얼른 사과 메일이라도 보내야 할 판이었다.
그래서 얼른, 다시, 새로, 내 글을 쓰자는 의욕이 실로 몇 년 만에 들었다. 오만하게 누굴 가르치려 들지 말고, 그저 내가 살면서, 읽으면서, 쓰면서, 그리면서 든 생각을 기록만 해보자. 기록하다, 조금 더 마음이 드는 부분이 있다면 그 부분만 기억해뒀다, 다시 한 번 제대로 써보자. 문장이란 이토록 신기한 존재다. 글자 몇 개로 이뤄진 텍스트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 쓰는 사람의 마음과 생각과 의도가 스며들어 읽는 이의 피부로 오롯이 느껴지니 말이다. 그러한 문장의 위력을 몰라보고, 내 의도만큼은 세련되게 숨길 수 있다 자신했던 오만하고 독선적이었던 과거의 나를 반성하며. 그냥 '쓰고싶은 마음' 하나만으로 쓰자. 그럼에도 그 글을 읽어주는 분이 계시다면,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인사하고 또 쓰자. 계속 쓰자. 많이 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