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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에 걸렸다. 잘하지 못 할까봐 안 하는 병에.

by bbulddae

현재 시각 오전 3시 3분.

비로소 최근 내 이상증세를 정확히 파악했다는 작은 깨달음이 와, 오지도 않는 잠을 부르려 애쓰지 않고 조용히 거실에 나와 노트북을 켰다. 최근의 내 상태는. 긴 연휴를 즐겼다. 열흘 내내 명절로 인한 집안 행사와 아이 챙기고 놀아주기를 제외하곤 계속 집안을 정리했다. 아이 돌잔치를 한 다음날 이사온 이 집에서 오늘까지, 제대로 된 정리 없이 무조건 쌓아놓기만 하던 짐(쓸모를 따지자면 쓰레기나 다름없는)을 볼 때마다 명치가 답답해지며 느끼던 스트레스를 끊어내고자, 아이 유튜브 주구장창 틀어주고선 몇날며칠 마스크 쓰고 짐을 고르고, 정리하고, 버렸다. 무던히도 버렸다. 채 다 마치지 못했지만 상당부분 정리가 되었고 가뿐한 마음으로 출근일을 맞았다.


출근을 했는데, 머리는. 아직도 연휴에 머무른 듯 잘 돌아가지 않았다. 머리는 물론 마음도 아직까지 어제에 머물러 있는 듯 - 청소와 정리, '버릴까 말까'만을 고민하던 단순작업에 쏠려 일이라는 복잡한 놈이 들어오질 못했다. 대학 때 출첵만 하고 몸이 빠져나오듯, 어제오늘 그렇게 워밍업이란 핑계로 업무시간을 보냈다. 꾸역꾸역. 꼭 해야할 일만을 하고, 그리고 내일은 좀 낫겠지, 모레는 더 낫겠지. 다시 잘 할 수 있겠지 하며 하루를 대강 끝내고 잠을 자려 했으나 -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잠이 오지 않으면 금세 나는 불행해진다. 잠들지 못하는 뇌는 비관회로를 무한대로 돌린다. 과거로, 미래로 수없이 돌아다니며 결국 안좋은 결론을 끌고나온다. 무엇이 문제인가. 나는 왜 일에 집중하지 못하나. 왜 힘들고, 어렵고, 억울하다는 생각만 드는걸까. 기자로 일할 땐 그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 기억 조작에 의해 좋은 기억만 남겼는지 몰라도 - 그 때 나는 나를 지금만큼 무력하게 느끼지 않았는데. 자신감이 있었고, 내 실력과 능력을 의심하진 않았는데 말이다.


너무나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 속에서 점점 작아지는 나를 1년 간 바라보았다. 새로운 일이라 배우고 익혀야 하지만, 욕심만큼 기대만큼 학습하지 못했다. 카페인 예민증인 내가 아침을 커피로 시작해 억지로 각성해 일을 시작하고, 이제 좀 집중이 될라치면 벌써 아이 하원하러 가야했다. 남은 일을 아이 재우고 해야지 다짐한 백번의 밤 중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잠 든 날이 팔십 일 이상이다. 지쳐서 잠들고, 자면서 꿈속에서 일을 못해 괴로워하다 새벽녘 눈을 뜨면 또 전쟁같은 하루가 시작됐다. 그렇게. 벌써 1년이 지났다.


나는 나아지고 있는걸까.

회사 안에서 나의 쓸모는 커지고 있는걸까.

내가 욕심만큼, 의욕만큼 해내고 있는가.


영. 자신있게 답하기 힘들다. 왜 나는 일에 내 전부를 던지지 않고, 계속 발끝만 담궈보다 겁먹고 최소한의 일만을 쳐내고 있는걸까. 예전의 나는. 결혼 전의 나는. 한창 때의 나는. 원래 나는 그러지 않았는데.


그러다 방금.

정확히는 19분 전, "잘 하지 못할까봐" - 라는 결론이, 비관적인 의식의 흐름 속에서 고개를 들었다. 놓칠 새라 얼른 건져내 보니 염려와 공포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내 모든 걸 던져 노력하고도 잘 하지 못할까봐. 겁을 먹고 던지지 않고 있었다. 약해진 체력, 육아의 고단함, 온 신경을 하나에 쏟지 못하고 분산시켜 많은 이들과 공간, 일을 챙겨야 한다는 압박감. 모두 이유가 될 수 있지만 - 좀 더 극한까지 나를 밀어부치지 못하는 궁극의 이유는, 내 능력이 결국 이 것밖에 안 된다는 걸 확인할까봐. 내가 이 일에 맞지 않는다는 결론이 날까봐 - 이게 맞지 않으면, 그럼 그 시점에 나는 또 무엇을 찾아야 하는가 - 아무도 답할 수 없는 그 질문에 답해야 할까봐.

나는 제대로 노력도 못하고 있었다.


나이는 이미 중년에 접어들었지만 마음 속 진짜 나는. 겨우 다서여섯. 내 아이와 같은 수준일 지 모른다. 좋아하는 만화를 보다 자깐 겁이 나는 장면이 나올 것 같으면 얼른 내 등 뒤로 숨어 눈만 빼꼼이 내밀어 안보지도, 제대로 보지도 못하는 지금 만 5세의 내 아이만큼. 내 자아도 고작 그 정도의 용기 뿐인가보다.


몸이 부셔져라 해보면, 답이 나올까.

당장 - 그렇게 부숴서 갈아넣을 몸이. 내게 남아 있는가.

그렇게까지 해서 종래에 나에게 - 남는 것은 악화된 디스크탈출증 외에 무엇이 있을까. 진정한 성취감이나 조직의 인정, 타인의 칭찬 - 이것이 내 인생에 정말 꼭 필요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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