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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bulddae Aug 21. 2023

이 세상에 '이토 준지'가 필요한 이유


많이들 그랬겠지만 나도 소싯적에 만화 좀 봤던 사람이다. 내가 초등학생 때는 그야말로 한국 만화 1세대의 시대였다. 언니와 없는 용돈을 모아 모아 월간만화잡지 '나나'를 사모았다. 90년대 초반 그 때 돈으로 4000원이니 비싸도 너무 비싼 가격이었는데, 언니랑 나는 과자를 못먹고 돈을 모아 나나를 샀다. 나는 돈을 잘 모으는 아이였고 언니는 서점을 밥먹듯 들락거리던 아이였다. 내가 돈을 잘 모아 언니를 주면 언니는 자기 돈과 합쳐 '이번 달엔 살 수 있겠어!'라며 다음날 하교길에 그 두껍고 무거운 나나를 사왔다. 어찌나 규모있는 잡지였는지, 당시 전과보다도 두꺼웠는데 역시나 엄마아빠 알면 다리몽뎅이 부러질 우리집이었던지라 사자마자 탐독하곤 엄마아빠 오실 시간 전에 장롱 밑에 넣어두었다. 두꺼운 월간지를 매월 쌓아두면 들킬 게 뻔하니, 몇 개월 지난 호는 컬러판 표지와 좋아하는 작품만 잘라내고 나머지는 폐기처분하는 주도면밀함도 있었다. 그렇게 또 몇개월을 모으면 상당한 부피가 됐지만 쨋든 상당기간 우린 나나를 지킬 수 있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됐을 땐 도서대여점 광풍이 불었다. 대여점은 200원, 300원만 내도 한 권을 볼 수 있어 만화 보기에 더 수월했다. 몇 주 지나지 않아 대여점 내 한국 만화는 모두 섭렵했다. 그러다 볼 게 없어지자 그토록 증오하던 '원수의 나라'인 일본 만화를 보기 시작했다. 원수의나라랑 말이 무색하게 나는 곧 클렘프의 광팬이 됐고 '드래곤볼',' 슬램덩크', '20세기 소년'을 울면서 보고 또 봤다. 좀 더 자라서는 '이나중 탁구부', '멋지다 마사루'를 접하며 요즘 말로 '컬쳐쇼크'를 경험했다. 이제 더이상 인어공주를 위하여에 만족할 수 없는 독자가 된 것이다. 그럼에도 김혜린 작가의 '비천무'나 '불의 검'은 지금까지 이따금 꺼내보긴 하지만.


그러다 진정으로 '이게 뭔가'라는 작가를 만났다. 이토 준지였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한 질감이 느껴졌다. 그림과 스토리, 표현과 아이디어는 그저 소름이 끼쳤다. 그럼에도 작가의 다른 작품을 자꾸 빌렸다. 괴이하게 팔이 늘어지고 꼬이는 주인공들. 눈알이 나오고 혀가 튀어나오고, 좀체 형언할 수 없는 괴이함과 공포, 이질감을 태어나 처음 느꼈다. 없던 환공포증이 생길 지경이었다.


지금 어른이 된 나에게 하루의 위안은 그날 나온 웹툰을 보는 것이다. 아이를 재워놓고 뒤돌아 누워 어둠 속에서 웹툰을 보고 잠든다. 포인트를 주는 오플에 출석체크를 하고, 오늘 나온 작품을 보고 댓글까지 본 후에 잔다. 지금은 일본이나 우리나라나 시장이 커져선지 정말 다양한 작품이 나온다. 그중엔 이토 준지의 아류라 할 만한 그림, 스토리, 기괴함을 갖춘 작가도 꽤 눈에 띈다. 이분들도 이토 준지를 보고 자랐겠지, 나처럼 처음엔 이상하다 무섭다 징그럽다며 토할 것 같은 기분을 느꼈겠지만 어느새 그와 비슷한 작품을 기획하고 그리고 있다. 그리고 만화가를 꿈꾸다 미대를 가고선 그저 사무직 직장인으로 어른이 되어버린 나는 그 작가들의 만화로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다.


이따금 생각한다. 나는 이토 준지 만화를 왜 그리 탐독했을까. 보기 거북한 그림들과 이야기를 왜 손에서 놓지 못했을까. '슬램 덩크'처럼 감동적이지도 않고, '서플리'처럼 현실적이지도 않은데다 '20세기 소년'처럼 거대한 세계관을 디자인한 스케일도 없는데. 그저 징그러움이 다였을까. 그럼 이토 준지는 왜 그런 작품을 그리고, 사람들은 그 작품을 찾는걸까.


행복하고 따뜻한 이야기는 그 자체로 충분하지만, 잔인하고, 무섭고, 드럽고, 혐오스러운 작품들은 존재에 질문을 자아낸다. 왜? 이 세상에 이런 작품이 왜 필요한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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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4학년, 우리 과에 특강하러 온 작가 김영하는 그랬다. 누구나 마음 속에 괴물이 있다. 그 괴물은 지하실에 숨어있다. 억누르기만 하면 괴물은 말 그대로 괴물이 된다. 하지만 괴물을 다독이고, 다듬어주면 달라진다. 햇볕도 쬐어주고 물도 주고 말도 걸면서 조금씩 지상으로 올라오게 길들여보자. 그러면 당신의 그 괴물은 엄청난 작품이 되어 다른 사람의 탄성을 자아낼 것이다. 여러분의 괴물이 궁금하다. 자신의 괴물을 보여달라.

내면의 괴물은 사람마다 각자 모습이 다르고 성품도 다르겠지만, 이토 준지의 괴물은 '혈옥수' 같은 모습이었다. 괴물을 잘 길들여 이토 준지는 세상에 내놓았다. 물론 그 괴물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괴물을 보고 자기 안에서 뭔가가 해소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남을 미워하는 마음, 나보다 약한 생명을 괴롭히고 죽이고 싶은 잔인함, 분노와 혐오, 질투와 배신감 같은 것들 말이다. 혈옥수를 보며 이런 감정이 위안받고 이전보다 부드럽게 녹아버린다. 혐오스런 작품도 나름의 카타르시스를 발휘하는 순간이다.


더 나아가 혐오스런 작품을 보고 자신의 부정적 감정을 달랜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내가 사는 곳의 흉악한 범죄도 조금은 나아질 거라 짐작한다.이런 작품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사람들이 분명 존재한다. 인간은 따뜻하고 행복한 이야기만으로는 위로받지 못한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내면의 악마성을 종이책 몇 권으로 해소할 수 있다면 이보다 경제적인 해결책이 또 있을까. 남보다 악마성이 조금은 더 강한, 괴물을 다독이지 못한 이들이 범죄자로 발전하지 않게 하는 건 이토 준지와 같은 이야기다. 작은 욕망 단계에서 해소시켜주는 역할은 행복한 이야기가 해내지 못한다. 혐오스러운 것도 세상엔 필요하다는 걸, 이토 준지의 만화가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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