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을 기다리듯, 연차를 기다린다.
하늘만 보면 이미 가을. ㅋ
살림하면서 제일 싫고, 힘든 게 뭐냐 물으면 난 단연코 '냉장고 정리'를 든다.
청소와 빨래, 설겆이는 은근한 쾌감이 있고, 요리도 잘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해낸다. 무엇보다 다른 일들은 하는 데 있어 그다지 스트레스가 없는데,
냉장고 정리만큼은 미루고 미루다 어쩔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소매를 걷어붙인다. 문을 열 때부터, 안에 묵은 반찬과 식재료를 꺼내면서 연신 짜증이 나고 한탄을 쏟아내며 한다. 미루고 미룰수록 상황이 심각해진다는 걸 모르지 않음에도 이 일만큼은 살림하며 내가 늘 부닥치는 가장 큰 난관이다.
엄마아빠 집에 살 때 냉장고는 내 관활이 아니었다. 혼자 살 땐 냉장고가 단출했다. 빈 공간이 많아 한눈에 파악이 되고, 식재료가 상할 때까지 두지도 않았다. 근데 결혼하고 내 살림을 시작하니 상황이 달라졌다. 아이를 위해 매일 뭔가를 새로 만들어야 했고 그러다보니 기본 야채와 고기를 늘 냉장고에 쟁여두었다. 야채는 어쩜그리 잘 상하는지, 조금만 눈여겨보지 않으면 색이 변하고 말라 비틀어지거나 반대로 물러서 물이 뚝뚝 흘렀다. 거기에 시어머님과 엄마는 원치도 않는 반찬과 김치를 보내오시니, 그걸 먹지도 못하고 그저 냉장고 여기저기에 넣어둘 수 밖에 없다. 양심의 가책을 느껴, 먹지 않아도 상하거나 곰팡이가 생기기 전엔 버리지도 못하니 냉장고는 늘 먹지않는 음식으로 가득 차있다. 냉장고는 내 집에서 내가 가장 컨트롤하지 못하는 영역인 것이다.
그나마 전업주부일 땐 일주일에 하루는 날을 잡아 채소를 정리하고 상할 것 같은 것들을 꺼내 버릴 줄도 알았는데, 직장을 다니기 시작하니 그 시간 내기가 쉽지 않다. 어제 저녁에도, 오늘 아침에도 눈에 보이는 반찬통 하나와 대파만 꺼내 얼른 다듬고 비워내곤 다시 냉장고 문을 닫았다. 매번 이렇게 하나씩, 급한 것만 처리하며 주말을 기약한다. 하지만 주말이 되면 또 다른 일들이 넘쳐나 냉장고 정리가 뒷전이 된다.
사람들은 구원을 기다리고, 기대하며 산다. 사람들이 열광하는 스토리, 특히 길게 연재되는 '연속극'을 보면, 다른 형태의 구원이 늘 등장한다. 구원은 뜨거운 사랑일수도, 헤어졌던 친어머니를 만나는 것일 수도 있다. 어느날 갑자기 대기업에 취직'되거나', 전에 없던 능력을 갖게 되거나, 원치 않는 사람과 얽혀 새로운 삶을 살기도 한다. 지루하고 희망 없는 이 일상이, 갑자기 불현듯 변화하는 모든 계기는 '구원'의 다른 형태다. 나는 그런 드라마를 보면 내 삶에 이런 구원이 쉽게 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언젠가 올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들뜬다. 즐거워진다. 돌이켜 보면 내 인생은 내내 갈망하던 구원은 끝끝내 오지 않았고, 예상치 못했던 '변화'가 일어나 구원처럼 내 삶을 바꿔놓았다. 하지만 바뀐 인생도 곧 힘들고, 지치고, 시들해졌으니 구원은 또 다른 구원을 갈망하게 만들었다.
여튼 나는, 우리는 구원을 기다리며 일상을 견딘다. 그리고 오늘도 좀체 오지 않을 '냉장고 정리하는 날'을 기대한다. 연차를 내는 건 쉬기 위해서가 아니라, 집에(특히 아이에게) 급박한 상황이 생겼을 때 뿐이고, 주말이 되어도 가족과 내 피로를 감당하다 순식간에 지나가버린다. 일요일 저녁이 되면, 아....또 못했네 하며 주말을 마감한다. 오로지, 냉장고 정리만을 위한 순수한 여유는 언제 올 것인가. 언젠가는 오겠지, 구원처럼 말이다. 오늘도 시든 채소를 못본 척 냉장고 문을 닫는다. 구원을 기다리듯, 혼자 조용히 앉아 냉장고 정리할 날을 기다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