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만에 찾은 단골빵집
날씨가 왜 아직도 이렇게 더운건지...
요즘은 웬만한 '빵집'은 커피를 같이 팔고 세련된 인테리어를 한 곳이 많다지만, 그 집은 20년 전 그 때도 빵집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외관이었다. 아주 좁은 골목 중간에 오래된 빌라 1층에 자리했고, 7평쯤 될까 싶은 좁은 공간에 벽돌같은 식빵을 쌓아놓은 곳이었다. 간판은 아주 낡은 널빤지에 'ㅇㅇㅇ베이커리' 글씨가 있을 뿐이고, 그나마도 너무 바래 글자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외관만 놓고 보면 손님을 기다리는 상점이 아니라, 벽돌을 찍어내는 공장에 더 어울렸다. 빵을 팔려는 목적이 아니라, 빵을 만들려는 목적의 공간이었다. 하지만 벽돌공장같은 외관에도 불구하고 빵 냄새가 너무 훌륭해 고개를 돌려 '여기 빵집이 있나' 살펴보게 만들었다. 사장님 혼자서 빵을 만들어 널어놓은 곳에 들어가 '하나만 주세요'하면 막 꺼내서 식혀놓은 식빵 한토막을 비닐봉지에 담아주셨는데, 어찌나 맛있고 부드럽고 향기로운지. 나는 호기심에 하나 사먹어본 후 그곳의 단골이 되었다. 그러면서 그 집이 식빵을 만들어 샌드위치 전문점에 납품을 전문으로 하는 곳이며, 새벽에 문을 열어 납품 물량을 만들면 바로 문을 닫는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그 집 식빵은 오후 3시가 넘어가면 먹을 수 없었다. 대학교를 다니던 나는 여유있는 날은 지하철 한 정거장을 일찍 내려 그 골목을 지나 등교하곤 했는데, 그땐 꼭 그집 빵을 샀다. 하나에 2300원. 가난한 학생도 충분히 맛볼 수 있는 황홀한 별미였다.
어느 추운 날 아침이었는데, 골목을 지나다 김이 솔솔나는 식빵이 그리워 가게에 들어갔을 때였다. 사장님은 머리카락에 밀가루를 묻히고 빵을 정리하고 계셨다. 하나만 주세요, 하곤 계산을 하는데 사장님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했다. 그 땐 신정도, 구정도 훨씬 지난 때라 새해인사가 어색한 때라 나는 "사장님도 복 많이 받으세요~"하고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다음 순간 사장님이 "올해 처음 오셨잖아요"하셔서 나는 더 깜짝 놀랐다. 어떻게 아셨냐는 질문에 사장님은 "손님처럼 활짝 웃는 분은 기억에 남죠"라고 나를 치켜세워주셨다. 그리고 그날 처음 사장님이랑 수다를 조금 떨었는데, 이 집은 소매가 아니라 샌드위치집에 납품하는 도매라는 점(그럼에도 사장님은 나처럼 개별적으로 오는 손님에게 식빵 한두개씩을 팔아주셨다), 사장님 건강이 안좋아 잠시 쉬셨다는 점, 건강 상태를 보고 빵집을 얼마나 더 할 수 있을지 결정하겠다는 점 등을 알게 됐다.
그로부터 한동안 골목을 지나도 빵집은 문이 닫혀 있어 다시 식빵을 사먹을 수 없었다. "닭고기야, 식빵이야~~~?!"하는 당시 빵 광고의 카피처럼, 잡아당기면 닭고기처럼 찢어지는 명품 식빵을 다시 보기 힘들었다. 건강이 다시 안 좋아지셨나, 이러다 빵집 없어지는 거 아냐? 하며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그렇게 얼마 지나니 않아 나는 학교를 졸업했고, 그 골목을 다시 갈 일이 좀체 없었던 어느 날이었다. 조선일보를 펴니 낯익은 가게 사진이 보였다.
빵 좋아하는 '조선일보 기자님'이 서울에 훌륭한 빵집 세 곳을 소개한 기사였는데, 거기에 그 집이 소개돼 있었다. '아...망했다'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때는 맛집 투어가 막 붐이 일기 시작하던 때였다. 그 직전까지만 해도 음식점 앞에 줄서는 풍경은 아주 드문 것이었는데, 먹방에 요리프로가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조금만 맛있다고 소문나도 사람들이 무람없이 줄을 서기 시작했다. 나는 이 집의 닭고기같이 찢어지는 식빵을, 다시는 맛볼 수 없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리고 실제로, 십수년이 흐르는 동안 그 집 앞을 두어번 지나갈 일이 있었는데, 그 좁은 골목이 그집 빵을 사려는 사람들 때문에 발 딛을 틈 없이 붐벼 좀체 범접할 수 없었다. 내 미소를 칭찬해주시던, 딱 한번 대화해본 사장님의 그 빵은 이제 먹을 수 없겠구나...하며 나는 내 소중한 단골집을 뺏어간 조선일보 기자를 증오했다.
하지만, 전 남친과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는 법. 예상치 못한 '재회'의 기회가 생겼다.
지난 주말에 아이를 데리고 언니와 지하철을 타고 모교 주변의 카페에 갔었다. 카페에서 놀고 주변을 산책하다 이제는 공원이 된 옛 기차길에 자리를 잡았는데, 아이를 안고 편의점에서 물과 우유를 사서 벤치로 돌아가려 보니 그 빵집으로 통하는 골목이 보였다. 맞다. 여기 그 빵집 있지. 라며, 지금도 사람들이 줄섰나 빼꼼히 보니 아무도 없었다. 아. 벌써 다 팔리고 일찍 문을 닫으셨나보네 하면서도 한번,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아이와 골목에 들어섰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집은 그 예전 간판을 그대로 단 채 문이 열려있었다. 아이와 빵집에 들어서면서도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옛날 그 사장님은 조금 마른 채로 머리카락만 하얘져 여전히 카운터 뒤에 서계셨다. 식빵만 있던 집이었는데, 소보루빵 크림빵에 빵 종류가 늘어나있었다.
식빵을 몇개 사야하나 하면서도 좀체 실감이 안났다. 계산을 하며 결국 나는 "저 20년 만에 왔는데, 어쩜 다 그대로네요"라고 말하고 말았다. 벅찬 감정을 참을 수 없었다.
"아 그래요? 그럼 중학생때 오셨나~?"라며 사장님이 웃으셨다. 같이 웃고는 '기사 나고는 사람이 너무 많아져 그 다음에 한번도 못왔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하얀 식빵을 세 개나 사서 나오는데 뒤통수에 대고 사장님은 "이제는 자주 오세요"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20년 전 단골집을 되찾았다는 기쁨에 오랜만에 옛날 생각이 났다. 언니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벤치로 오면서도, 아이에게 '엄마가, 진짜 좋아하는 빵이야' 라고 말했다. 그리고 벤치에서 간식을 먹고, 아이는 바닥에 앉아 자갈을 갖고 놀다가 지쳐 잠이 들었고 어찌어찌 집에 돌아왔다. 땀에 잔뜩 절어 아이를 눕히고 나는 제일 먼저 빵봉지를 풀었다. 빵 냄새가 풍겼다. 와....기대에 가득차 한 입 베어물고는 옛날 그 맛을 떠올리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옜날 만큼 맛있는 식빵은 이제 없었다. 20년 전 손으로 뜯어먹던 그 맛있는 식빵은 이제 없는 걸까. 사장님의 솜씨가 달라진 걸까, 내 입맛이 달라진 걸까. 분명히 여느 식빵보다 맛있는데, 왜 나는 예전만큼 맛있지 않은걸까. 여러가지 생각을 하며 빵 한 봉지를 남기고 나머지는 냉동실에 넣었다. 20년 전 등교길에 기차길을 건너며 뜯어먹던 식빵에 대한 기억도 얼도록, 나는 냉동실 문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