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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bulddae Sep 19. 2023

내 인생이 아깝다

자료 서치하다 픽사 홈페이지 들어갔더니 이런 고퀄의 작품이...!!!

없이 자라서인지, 어릴 땐 허튼 약속을 다녀오는 길엔 돈이 아까웠다.


나도 (지금도 그렇지만) 참 거절 못하는 성격이라, 또 젊은 치기에 이 사람 저 사람 막 만나고 술마시는 게 좋다고 참 많은 자리에 불려가고 부르며 다녔다. 재수를 거쳐 대학에 입학하니 술 마실 일이 차고 넘쳤다. 난 또 여자치고는(이것도 이제는 성희롱 성 발언이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세상이 이렇게 바뀌었구나 하며 놀란다) 술 잘 먹는다는 이상한 자부심에 많이, 자주, 꽤나 마시고 다녔다. 학생이 무슨 돈이 있겠냐, 그러면서도 술 마실 돈은 신기하게 생겨났다. 입시미술학원 알바를 뛰고 선배 따라가 벽화 그리며 번 돈 대부분이 유화물감과 와꾸, 영화관 입장료, 술값으로 쓰였다. 유흥으로 물든 대학시절이 지나가고, 본격적으로 사회인이 되어 월급이란 걸 받기 시작하니 돈 버는 게 얼마나 숭고한 일인지 알게 됐다. 학생 때야 '학생이니까' 맘만 먹으면, 방학이 되면, 과제할 시간만 좀 줄이면 돈은 얼마든지 벌 수 있을 것 같았지만 학생이란 안정적인 직업이 사라지니 그야말로 사회는 낭떠러지였다. 돈을 못 버는 건 예전과 똑같았지만 이제는 여차하면 직업란에 기입할 직업이 없는 백수이니 말이다. 그저 돈 못버는 한 마리 백수에게 만 원, 이만 원, 오만 원, 십만 원이 얼마나 큰 돈이었는지 모른다. 물론 지금도 큰 돈이지만.


어어어 하며 얼결에 따라가 떠들며 놀다 갹출해서 술값을 내고 집에 오는 길엔 꼭 '낼부턴 이렇게 살지 말자' 되뇌었다. 술값이 너무너무 아까웠다. 없는 살림에, 그 돈이면 영화를 몇 번을 볼 수 있는데, 예스24 장바구니에 넣어놓은 무슨무슨 책을 살 수 있는데 하며 술에 취해 후회했다. 지금은 영화도 책도 전혀 보지 못하고 살지만, 그땐 참 많은 작품을 접하며 살았다. 사람들 속에 섞여 그렇고 그런 농담으로 시간을 채우며 낸 돈이 아까워 어떤 날은 눈물이 났다. 돈이 아까워 약속을 줄여야겠다 다짐했었다.


지나면서 사회생활 연차가 쌓이자 조금씩 조금씩, 이직을 할 때마다 많이씩, 내가 쓸 만큼의 돈은 충분히 벌 수 있게 됐다. 친구들이나 술과 밥을 많이 얻어먹은 선배를 만나면 내가 낼 수 있을 정도로 주머니와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점차 멀어지면서 이제는 시간이 아까워졌다. 별 감흥 없는, 기대와 다른 저녁 자리가 끝나고 집에 오는 길엔 흘러간 저녁 시간이 아까워 화가 났다. 충동적으로 저녁 약속을 잡고, 약속을 어기지 못해 3~4시간의 저녁을 흥청망청 보내고 오는나에게 너무 화가 났다. 이 시간이면 집에서 잠도 자고, 책도 보고, 영화도 한 편 보고, 블로그에 글도 썼을텐데!-약속 없는 날이어도 정작 이런 활동들은 거의 하지 않으면서- 하며 분한 마음이 들었다.


언젠가부터는 '어렸을 땐 시간이 있으면 돈이 없고, 돈이 있으면 시간이 없었는데. 이제는 둘 다 없어!'라며 친구들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돈을 벌면 시간이 없어지고, 시간을 확보하려니 돈을 못벌었다. 특히 여행을 가려고 마음 먹으면 꼭 어느 한 쪽이 부족했다. 돈을 못 벌 땐 시간이 짱짱해도 떠날 엄두를 못내는 백수였고, 일하는 직장인이 되면 시간을 못 냈다. 그 때부터였다. 나는 가끔가다 약속을 잡자는 친구가 나타나면 혼잣말 한다. "이제는 돈도, 시간도 아까워... 쓸 데 없는 건 절대 안 할 거야. 그럴 틈도 없어"라고.


며칠 전 다 큰 어른이 돼 알게 된 누군가에게 카톡이 왔다. (자세한 관계를 밝힐 수 없는 건, 어쩌면 내 브런치가 유명해져 여기저기 많은 사람들이 읽다 '어, 이거 내 얘기 아냐?'하고 항의할까봐 그렇다. ㅋㅋㅋㅋㅋㅋ) 휴일에 만나자는 제안이었는데, 이래저래 일정이 있고 아이와 시간을 보내고 싶어 거절했다. 아이와의 일정이 있는 건 사실이었지만, 기실 만나면 말을 맞춰주기가 너무 힘든 사람이라는 이유가 더 컸다. 그러자 그 사람은 '아이는 아빠에게 맡기고 너도 하루 쯤 신나게 놀아야지'라며 강하게 나왔다. 그 순간 나는 '그 귀한 시간에 왜 내가 너를 만나'라고 말할 뻔 했다. 했으면 아마 그 사람은 다신 내게 연락하지 않았겠지. 상대에게 조금 미안했지만, 이제 나는 조금이라도 허툰 시간을 쓸 여유가 없거니와, 허툰 일정을 잡기엔 돈도, 시간도 너무 귀한 처지가 되었다.






얼마 전 점시시간에 혼자 밥을 먹으러 나갔을 때였다. 뒤에서 두 아저씨가 하는 대화가 가까이에서 들렸다. 두 사람은 돈이 어떻고 저떻고 하는 말을 주고받다 조금 더 젊어뵈는 측이 말했다.


"돈도 있고 시간도 있는 때가 되면, 체력이 없겠죠."


여태껏 돈과 시간만을 놓고 생각할 만큼, 나는 체력이 좋았던 거구나 하고 깨달았다. 디폴트라는 말은 이런 때 쓰는 말이다. 체력을 변수로 놓지 않을 만큼 짱짱한, 한번도 크게 아파본 적 없는 체력을 디폴트로 깔았던 삶을 내가 살아왔구나.


돈도 없고 시간도 없었지만, 체력은 무한했던 시절. 저녁만 사주면 야근을 했고, 똑똑한 취재원이 온다 하면 마다하지 않고 달려가 술을 마셨다. 기획기사를 쓰는 날엔 집 앞 24시간 카페에서 밤을 새워 일했고, 주말에도 행사가 있으면 낮잠을 자다 일어나 튀어나갔다. 그렇게 돈을 벌었다. 시간이 없다 투덜거리면서도 통장 잔고를 보면 불평이 쏙 들어갔다. 내 무한할 줄 알았던, 부모님이 주신 귀하디 귀한 체력을 때려박아 버는 돈인줄도 모르고 말이다.


그 시절이 진정, 돈보다도 시간보다도 내 삶의 '대부분'을 가진 때였구나. 체력이 바닥을 찍기 시작한 마흔 줄에 들어서야 오는 깊은 깨달음. 잃고나서야 보이는 내 가장 큰 자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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