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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bulddae Oct 25. 2023

유혹. '10분만 일찍갈까' 속삭이는 악마의 유혹.

근데 요즘 케익값 진짜 너무 비싸다...케익만 비싼 건 아니지만서도.

오늘따라 상사는 5시 반에 자리를 떴다. 평소에는 그러거나 말거나 별로 신경쓸 이유가 없었다. 내가 다니는 회사는 출퇴근을 그룹웨어에 표시하는데, 정각 6시가 되지 않으면 퇴근 버튼이 활성화되지 않기에 상사 아니라 사장이나 회장이 자리에 없다 해도 땡땡이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후 6시 정각. 내 자리에 무조건 앉아있어야 퇴근이 되는 곳. 그러나 첫 줄에 쓴대로 하필 '오늘따라' 상사는 자리를 일찍 비웠다.






오늘은 아이의 생일이다. 다른 집은 생일날 어린이집을 빠지고 하루 롯데월드에 놀러가기도 하던데, 아직 입사 1년이 되지 않은 나에게 연차는 늘 모자랐고 어쩌다 응급시에도 반차 아닌 반반차를 내며 아껴야했기에, 어린이집을 빠지는 게 아니라 내가 회사를 빠질 수 었었다. 대신 선물은 한 달 전 미리 준비해 아남편이 다이소에서 산 포장지와 리본으로 현란하게 포장해둔 터였다. 딸기케익이 먹고싶다는 아이 의견에 따라 회사 앞 고급베이커리에서 케익도 예약해두었다. 이제 6시에 나만 튀어나가면 된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퇴근시간 지하철은 소리없는 아우성, 총탄 없는 전쟁터다. 그 케익을 안고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지하철에 타야 한다.간신히 탄 후에도 역을 거듭할 수록 승객이 더더더 밀려드니 케익을 지켜낼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만화에서처럼 케익을 머리 위로 받쳐들고 서있어야 하나. 그리고 결정타는 오늘내일 연가를 내둔 남편의 카톡. 같은 팀 형님이 모친상을 당해 야간당직을 빠질 수 없게 됐다며 팀장이 양해를 구하고 연가를 취소시켰단다. 좌절에 가까운 기분이 엄습했다. 친정에서 이모,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생일파티를 앞두고 있는 아이는 이제 '엄마와 아빠'가 아니라 '엄마'만을 기다려야 한다. 다행히 무지막지하게 큰 선물상자는 미리 외갓집 삼촌방에 가있지만, 나는 이제 케익을 들고 한시라도 빨리 친정에 가 닿아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국장이 5시반에 자리를 정리하고 사무실을 나섰다. 외부 간담회가 있다며 일찍 자리를 비웠다. 이렇게, 내 일생일대 손에 꼽을 만큼 절박하게 갈등하고 고민하는 시간이 되었다. 20분이라도 빨리 출발하면 지하철이 붐비지 않을텐데. 그룹웨어고 뭐고, 그냥 나갈까. 조용히 앉아있는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가방을 들고 슬그머니 나갈까. 퇴근을 체크하지 않았다 해서 인사팀에서 바로 전화올리 만무하다. 만약 문제삼는다면 '어. 어.....체크했는데?! 왜 반영이 안됐죠?!!' 하며 어설픈 연기를 하면 되지 않을까. 20분. 아니 10분. 5분 만이라도 일찍 나간다면 조금 더 수월하게 친정에 도착할텐데. 어차피 퇴근버튼을 누르지 못할 거면 지금 나가는 게 낫지 않을까. 친한 후배에게 6시에 퇴근버튼을 눌러달라 할까. -별의별의별. 생각이 머리속을 헤집었다.


고민하는 사이 시간은 5시 48분이 되었다. 단 십여분 동안의 고민과 갈등으로 나는 한 2년 정도 늙은 것 같다. 조바심이 극에 달해 명치가 간질간질하고 손이 차가워졌다. 지금이라도. 지금이라도 그냥 나갈까. 고민의 크기에 반비례해 시간은 더디 갔다. 시계에서 눈길을 거둘 수가 없었다. 단 10분인데. 내 할 일은 다 해놓았고, 남은 업무도 없다. 어차피 6시까지 남은 시간은 그저 인터넷을 뒤적이거나 멍때리는 게 전부다. 오늘 아침에 15분 일찍 출근했으니, 10분 일찍 나간다 해도 할 말은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고민고민. 갈등을 거듭한 끝에 나는 6시 정각 나가기로 결심-결정, 보다 더 엄중한 느낌의 '결심'이란 단어를 쓸 만큼 정말 나는 결심-했다. 그러고는 50분에 일어나 밖에 나가 케익을 먼저 찾아다 책상에 올려두었다. 자리를 정리하고 옷을 입고 운동화로 갈아신었다. 57분. 이제 3분 후면 클릭만 하고 얼른 일어나자. 고민의 정도가 무색하게, 결정은 싱겁게 내려졌다. 약속을 지키기로 했기 때문이다.


출근과 퇴근은 약속이다. 회사에서 월급을 받기로 약속했으니, 나는 정해진 시간에 나에게 떨어진 일을 해야 한다. 회사는 나에게 세금을 제한 급여만 주면 되지만, 나는 '정해진 시간을 지킨다'와 '내 일을 한다'는 두 가지 약속을 지켜야 한다. 내가 좋아하는 만화 '서플리'에서 여자주인공은 토요일에도, 일요일에도 출근하며 자기에게 서운해하는 남자친구에게 말한다. "일은 약속이야. 이 일을 언제까지 마무리하겠다는 약속. 여자친구가 그 약속조차 못 지키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무심히 출근하는 주인공 뒤로 아무말 못하고 원망만 그득한 남자의 얼굴이 있었다.  


나도 약속을 했으니, 편법 없이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비단 내가 계약서를 썼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저 하루, 후배에게 사정을 말하고 클릭 한번 해달라고 편법을 쓸 수도 있지만 그 순간 이 후배에게 나는 소위 '후루꾸'를 쓰는 '편법적인 선배'가 된다.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이런 것들이 모여 그 사람이 되고 평판이 되는 걸 많이 봐오지 않았나.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평판도 아닌 나 자신이다. 그런 속임수를 쓴 나는 스스로에게 '필요에 따라 약속을 어길 수도 있는 사람'이 된다. 그 누구도 속일 수 있지만 나 자신만은 속을 수 없는 법. 나는 내 인생을 바라보는 제1의 전지적 작가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아이의 생일이다. 내 아이의 생일을 핑계로, 내 약속을 어기고 속임수를 쓰진 말자.



                                                                                      ...



여기까지 생각이 도달하니, 갈등이 사라졌다. 지옥철은 피할 수 없지만, 견뎌야 할 시련일 뿐이고. 나는 되도록 무사히 케익을 지켜 빨리 아이에게 달려가는 데에만 집중하자. 이렇게 마음을 먹었지만 시계바늘은 정말, 시쳇말로 '더럽게' 안 움직였다. 세상에나 마상에나. 이렇게 시간이 더디 갈 수 있나. 내 인생 최고로 느린 시간이 흘렀다.  눈으로 밀어올리다못해 원기옥이라도 발사해 시곗바늘을 움직이고 싶었다. 6시. 6시만 되라. 제발. 6시. 아들이 기다린다. 피자 왔는데, 엄마 오면 같이 먹는다고 안 먹고 콜라만 마시고 있단 말이다. 6시야. 제발. 얼른 와라 얼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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