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bulddae Dec 12. 2023

"혼자 떠나요, 남편님. 한달만"

이라고 말하는 유능한 아내이고싶다...

남편 혼자 유럽여행을 보내고 싶다. 단 한달이라도.


그는 결혼 전 4개의 통장을 관리하던 아주 계획적인 사람이다. 월급이 들어오면 적금통장1에 얼마, 적금통장2에 얼마, 적금통장3에 얼마, 이렇게 한 후 생활비 통장에 적은 돈을 넣고 남은 돈은 또다시 저축했다. 70,80년대 박정희시대에 태어났으면 아주 칭송받았을 성실하고 근검절약이 몸에 밴 사람. 돈을 쓰는 재미는 하나도 모른채 돈 모으는 재미만 아는 사람, 그렇게 모은 돈을 '형, 나 이번에 스투디오 늘리는 데 얼마만 꿔주라'하는 하나밖에 없는 동생에게 홀랑 다 꿔주고 받지도 못하는 사람. 결혼하고 나서 그런 돈을 추정해 화가 남에도 불구하고 꾹 참으며 '그동안 꿔준 건 그냥 준 걸로 생각하고 잊자. 그러나 앞으로는 꼭 내게 상의해 돈을 꿔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내가 보기에 시동생의 됨됨이는, 벌 줄은 모르고 쓸 줄만 아는, 자기 형과는 정반대의 아직 경제적 여건이 불안한 무명영화감독이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그가 꾸준히 돈을 모으던 또 하나의 통장이 '배낭여행 통장'이다. 막연하게, 그러나 절실하게 유럽여행을 꿈꿨던 그는 한 달에 얼마 씩, 꼬박 십년 가까이 모아 그 통장에 이천여만원을 보유하고 있었다. 일하는 내내 유지했으니 그 끈기가 정말 대단하다. 이 통장 만큼은 그의 동생도, 어머님 댁 전셋값도, 어떤 생활비로도 헐지 않았다. 해외에 거의 나가본 적 없는 그에게 배낭여행은 얼마나 강한 열망이었을까. 우리는 신혼여행을 스페인으로 갔고, 신혼여행을 위해 낸 2주간의 휴가가 그의 40년 인생 중 거의 첫 3일이상 된 휴가였다는 사실에 나는 진짜 마음이 짠했다. 이 사람이랑 많은 데를 여행해야지. 많은 걸 보여주고 새로운 걸 같이 경험해야지-하는 다짐이 내 결혼을 결심하게 한 동기 중 하나였는데, 내 다짐이 무색하게 나는 결혼 후 곧바로 임신했고, 결혼식을 올린 후 정확히 30일 후 코로나가 터져 한국, 서울 그 중에서도 우리집 안에 갇혀버렸다. 코로나가 잦아들었지만 아이는 아직 어렸고, 해외여행은 이제 요원하다 싶었는데. 전세값을 마련하느라 남편과 나는 웬만한 보험과 모든 적금을 해지해야 했다. 배낭여행 통장도 그 때 깨어졌고, 여행기금으로 모아진 돈은 전셋집 주인 통장으로 녹아들었다.  


이제 아이가 조금씩 자라는 게 보인다. 이렇게 크면 내년이나 내후년엔 정말, 해외여행을 포함해 스페인에 사는 동생네 집에도 같이 가볼 수 있을 것 같다. 나도 맞벌이를 하며 마음과 주머니에 여유가 생겼고, 이제 내년 8월부터는 근속1년을 채워 연차도 여유있게 챙길 수 있게 됐다. 이제 나는 시간의 여유만 찾으면 여행이란 걸 다시 갈 수 있게 됐지만, 남편은 갈수록 일이 쌓이고, 스트레스가 쌓이고, 마음이 무거워지는 게 느껴진다. 학교에 다니고, 임용시험을 3년 내리 준비한 후, 임용 후 20년 가까이 일해온 지금까지 신혼여행 2주가 그가 내본 장기 휴가의 전부인 사람. 배낭여행을 그렇게 가고싶어 했던 그를 생각하면 , 더 늦기 전에 그에게 '여행'을 선물하고 싶다.


그의 20대 목표를 지금 40대에라도, 시간과 돈의 제약 없이 내가 선물해주고 싶다. 혼자서 홀가분하게, 처음엔 헤매고 두렵고 긴장되고 어리둥절하겠지만, 여행이란 게 그렇듯 또 그 어리둥절한 상황 자체에 적응이 되고 익숙해지면 얼마든지 다닐만 하게 되는 것이다. 누구를 만나든, 어디를 가든, 무엇을 보고 무엇을 먹든, '자기 마음대로, 평생 처음으로, 자유롭게' 다니길 바란다. 그렇게 다녀와 아이와 나를 데리고 다시 여행을 떠나 본인이 겪어본 중 좋았던 걸 우리에게 으쓱이며 보여주는 모습을 보고싶다. 남편이 먹어본 맛있는 거, 보았던 중 같이 보고싶을 만큼  좋은 것, 들었던 것들을 아들과 아내에게 소개해주는 모습을 보고 싶다. 번아웃이 온 이 경위님, 조금만 참아요. 내가 여행 보내줄게.

매거진의 이전글 입시철, 문화예술학과 진학? "도망가, 마지막 기회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