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를 다시 다니기 시작하면서, 실로 오랜만에 책을 읽기 시작했다. 정말. 오랜만이다. 이렇게 열정적으로 책에 빨려들어 읽은 건 거의 대학 이후 처음인 듯 싶을 정도다. 특히나 일을 시작하고, 곧 스마트폰을 샀는데 그때부터 내 독서라이프는 멸종하다시피 했으니. 요즘 책이 너무 재밌어 출퇴근 시간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다. 회사에서도 점심을 얼른 간단히 먹고 책을 읽는다. 누가 보면 이제는 사라진 사법고시라도 준비하는 줄 알겠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만, 스마트폰이 생기면서 나도 책 읽는 게 아주 힘들어졌었다. 책과 스마트폰. 도무지 게임이 되지 않는 경쟁이었다. 스마트폰은 오고간 카톡 문자만 읽어도 재밌고, 책은 아무리 얼굴을 묻고 있어도 읽은 페이지 한 장을 맴돌뿐 진도를 못 나갔다. 더군다나 일 자체가 뭔가를 계속 읽고 쓰고, 듣고 쓰고, 전화 받고 쓰고, 얘기한 걸 쓰는 작업이다 보니 일이 끝나면 텍스트를 읽는 건 진절머리가 났다. 진절머리를 내며 스마트폰을 보고, 유튜브를 보다 또 자고 일어나 출근을 하면 텍스트를 읽고 쓰며 일을 했고, 그렇게 15년 했으니 어쩌면 책을 읽지 않은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나는 책을 좋아했다. 책 욕심이 나서 관심 가는 주제나, 좋아하는 작가 책을 샀다. 읽을 것처럼 샀지만 결국 읽지 않았고 그렇게 사모은 책이 집에 한 가득이다. 책이란 참 이상한 게, 서점에 서서 읽으면 그렇게 재밌다가도, 결제해서 들고나오면 흥미가 급격히 떨어졌다. 멍청한 뇌는 돈을 주고 사는 순간, 이 책을 다 읽었다고 착각하는 것 같았다. 다 읽지도, 그러면서 버리거나 누굴 주지도 못하는 책이 쌓여있다. 책은 마음의 짐이라 했던가. 책장에 꽂힌 책을 볼 때마다, 책장을 정리할 때마다 '읽어야 하는데. 언젠간 읽겠지'. 마음의 부채의식만 높아졌다.
애낳고 키우며 책장엔 새로운 카테고리 책이 쌓이기 시작했다. 육아 전문서, 아기 응급상황 대처법, 모유수유 법 등등 누가 주거나 내가 산 책이 늘어났다. 점점. 누가 준 책도 열어보면 읽은 티 없이 말끔했고, 나 역시 그 책을 읽지 않았다. 애 낳기 전에 미리 읽은 것들은 '현실'이 아직 아니기에 와닿지 않아 계속 읽기 힘들었고, 아이가 태어난 다음엔 책을 찾아볼 정신이 없었다. 이래저래 육아책은 무용지물이었다. 그러다, 아이가 좀 크고. 내가 좋아하는 서천석 박사님의 아주 작고 얇은 책 한권을 구매하며. 나는 거진 10년 만에 제대로 책 한 권을 다 읽었다. 밑줄을 긋고 책갈피스티커를 붙이며 열정적으로 읽었다. 중요한 부분은 사진을 찍어 스마트폰에 저장해두고 수시로 보았다. 밑줄을 그은 부분은 대부분, 유용한 정보라기 보단 그 순간 내 마음에 와닿은 문구들이었다. 그 문구를 다시 꺼내볼 때마다, 책에서 그 문장을 처음 만난 순간의 전율이 재연됐다. 독서의 즐거움을 10여년 만에 상기하며, 나는 또 다른 육아책, 미술사책에 이어 색다른 책을 샀다. 이번엔 청소년을 위한 물리학 책이다.
요즘은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이 책을 읽는다. 양자역학, 상대성원리, 뉴턴의 역학 등등... 분명 학창시절 배웠던 것 같은데 정체를 알 수 없는 말들이, 쉽게 잘 쓰여진 문장을 통해 살아서 내 머리에 입력됐다. 이래서, 뉴턴이 그렇게 위대한 거구나. 아인슈타인은 정말 천재였구나- 어떻게 인간의 머리로 이런 생각을 했지? 라부아지에- 내가 이름을 기억하는 걸 보니 훌륭한 사람인 줄 알았지만 정말 위대한 발견을 했던 사람이구나. 놀라운 '물리'(物理)의 세상이 펼쳐졌다.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믿던 사람들이, 이제는 우주에 로켓을 보내고 원자의 움직임을 수학으로 계산하고, 반도체를 만들어냈다. 인류는 정말 위대하구나- 과학의 역사는 수학이나 물리와는 전혀 상관없는(줄 알고 살던) 한 아줌마를 연신 감탄하게 했다. 감탄은 흥미로, 호기심으로 이어졌다. 책장을 넘기는 손을 멈출 수 없었다.
심지어, 에디슨이 발명한 직류 전기를 만드는 발전소가 뉴욕에 있었고, 이 발전소에서 공급한 전기는 2007년까지도 뉴욕의 1600개 가구에 공급됐다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나는 소름이 끼쳤다. 이럴수가...대박.
어제는 지하철에서 책을 보다 내릴 역을 지나칠 뻔 하곤 지하철역을 빠져나오며, 네온사인으로 요란한 거리를 보는데 문득 책은 전세값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끊고 스마트폰에 빠져 살아온 지난 10여년 동안, 나는 유튜브와 인터넷에서 정말 많은 정보를 접했다. 그러나 그 정보들은 언제, 어디로 갔는지 모르게 사라졌다. 물론 그 중 상당부분은 내 머릿속에, 내 무의식에 저장돼 나라는 사람을 변화시켰겠지만 나는 그 정보의 파편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마치 달달이 주인집 통장에 보내는 월세처럼, 열심히 벌어 송금했지만 시간이 지나도 나에게 쌓이지 않는 월세처럼 말이다.
그런데 책을 읽는 건 전세보증금을 갚는 대출금같다. 내 시간을 투자한다는 건 동일하지만, 달달이 은행에 부쳐 몇년이고, 몇십년이고 축척되면 그 전세보증금은 내 돈이 된다. 달달이 채무를 이행하는 건 같은데, 하나는 누적되고 하나는 남는 게 없다. 그래서 사람들이 (지금과 같은 고금리 시절 전에는) 그렇게 전세를 얻으려 노력했었다. 책을 읽으면, 내 내용이 어쨋든 간에 내 안에 이 책이라는 하나의 그릇이 새로 생긴다. 내용을 모두 그릇 안에 저장해두진 않지만, 그릇이 생긴 이상 앞으로 살아가며 보고 듣고 느끼는 것들 중 그릇과 관련된 것들은 그릇 안에 쌓인다. 그릇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현격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라는 사람이 어떤 인간이 되어가는 지를 결정하는 거니까.
그래서 앞으로도, 노안이 와서 책 읽는 게 불편해지고 책이 무거워 들고다니기 번거로울지라도 내 시간을 전세보증금-책에 투자하려 한다. 가능한, 여태 내가 전혀 관심갖지 않았던 분야의, 아주 생소한 제목의 책이라 하더라도. 더 많은 그릇을 만들어 나를 만들어야지. 갈수록 더 많은 얘기를 해달라 조르는 우리 아이에게 내가 아는 것들을 '옛날 얘기'로 이야기해주기 위해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