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을 기다렸습니다.

by 상현달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께서 갑작스럽게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 혼자의 벌이로 아들 둘을 먹여 살리는 것도 힘들었지만 아버지가 남기고 간 빚이 있었기에 형편은 쉽게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형편이 나아지기 보다는 도리어 더 어려워져만 갔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학교에서는 수학여행이 계획되었습니다. 지금에야 어려운 학생들을 위한 복지사업이 잘 이루어져 있어서 수학여행을 형편상 못 가는 경우는 거의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25년 전만 해도 어려운 학생들을 지원해 주는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지 않았습니다. 집안의 형편을 알기에 제가 먼저 엄마에게 말했습니다.


“엄마, 수학여행 고등학교 때도 가지?”

“그러면, 나 수학여행 지금 안 가고 고등학교 때 갈래.”


엄마는 아무런 말이 없으셨습니다. 엄마는 말 대신 눈물만 계속 흘리시고 계셨습니다. 그렇게 저는 엄마와 한참을 울었습니다.


다음날 담임 선생님이 저를 따로 부르셨습니다.


“상현아, 수학여행비는 선생님이 냈으니까 걱정 말고 함께 가자.”


제가 수학여행을 갈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이미 선생님께서는 저희 집의 형편을 알고 계셨기에 돈을 대신 내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대신 저는 선생님 앞에 선 채로 눈물로 주루룩 흘렸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이 되고서나서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마저 저의 곁을 떠나셨습니다. 어머니의 갑작스런 죽음은 어린 저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멍하니 앉아 있는게 하루 종일 제가 하는 일의 전부일 때가 많았습니다. 학교에서도 선생님이 하시는 얘기가 귀에 들리지 않았습니다. 멍하니 칠판을 보고 하염없이 눈물만 흐를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제가 먼저 하는 일은 TV를 켜는 것이었습니다. 혼자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기 위에 아침, 저녁 항상 TV를 켜 놓았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 학교에 있는 기숙사에 들어가기 전까지 아침밥과 저녁밥을 먹어 본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먹을 반찬이 없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더 싫어던 건 혼자 밥상에 않아 밥을 먹는 것 이었습니다. 그렇게 2년을 보내고 학교의 배려로 기숙사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기숙사 생활은 너무 좋았습니다. 같이 밥 먹을 친구도 있고, 함께 이야기할 누군가가 있고, 잠자리에 혼자 들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기숙사에서 보낸 1년은 저에게 정말 꿈만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밥 할 걱정, 외로울 걱정, 혼자 놀 걱정,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냥 공부만 하면 되었습니다. 기숙사에서 보낸 1년의 생활은 아주 빠르게 지나갔습니다. 외로움이 채워져서 그런지 공부하는 것이 즐겁기만 했습니다. 비록 성적이 아주 좋은 것은 아니였지만 나쁜 길로 갈 수 있었던 저에게 기숙사에서 공부했던 생활은 저를 바른 길로 갈 수 있게 해준 기회가 되었습니다.


1년 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를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대학을 가기는 했지만 납부금를 내야하는 현실에 바로 직면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외삼촌이 저를 앉혀 놓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상현아, 납부금은 걱정하지 말아라. 그리고 그동안 고생했으니까 대학 생활 재미있게 하면서 공부하렴.’

외삼촌과 이모들 형편도 넉넉하지 않았지만 외삼촌과 이모들은 십시일반 돈을 모아 제 납부금을 마련하셨습니다. 형편상 저에게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 인 것 같았던 대학 생활이 어느덧 제 앞에 놓여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신입생 때의 대학생활은 정말 꿈만 같은 나날들 이었습니다. 캠퍼스 생활은 그동안 제가 겪은 힘듬과 외로움의 보상처럼 모든 것이 즐거웠습니다. 자연스레 공부보다는 친구들과 어울리는걸 좋아하게 되면서 성적은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르바이트와 학생 조교를 하며 학비를 스스로 마련했습니다. 아르바이트를 하나씩 늘리면 늘리수록 성적은 점점 내려가고 대학 생활은 즐거움보다는 고됨이 조끔씩 늘어만 갔습니다.


시간은 참 빠르게 지나갔습니다. 어느덧 4학년 말, 임용 시험을 코 앞에 두었습니다. 아르바이트를 하긴 했지만 그래도 새벽과 밤에 공부를 꾸준히 했기에 어느 정도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첫 시험은 불합격이었습니다. 며칠간 밖을 나가지 않았습니다.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머릿속에는 온통 실수해서 틀린 한 문제가 빙빙 돌아다녔습니다.


‘그것만 맞았더라면, 그것만 실수하지 않았더라면, 합격할 수 있었는데...’


이렇게 후회하는 나날들이 이어져 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세수를 하고 거울을 봤습니다. 부스스한 머리, 쾡한 눈, 깎지 않은 수염. 이런 모습은 제가 꿈꾸던 그런 저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래, 내년에는 꼭 붙을거야. 너무 좌절하지 말고 힘내자.’


거울을 보며 스스로에게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교재비와 강의비를 마련해야 했기에 기간제 교사를 하며 공부를 병행했습니다.


어느덧 시간 날짜가 가까워졌습니다. 이번에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첫 시험에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았기에 더욱 합격이라는 자신감이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시험도 불합격이었습니다.

그렇게, 세 번째 시험도 불합격이었습니다.

다시 1년 뒤 네 번째 시험도 불합격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이라고 다짐했던 다섯 번째 시험도 불합격했습니다.


연속되는 불합격에 몸도 마음도 지쳐만 갔습니다. 그리고 정말 교사가 되어야 하나라는 회의감도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 길이 내가 가야 하는 길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웠습니다. 이런 생각들로 머리가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무작정 짐을 싸서 떠났습니다. 발길 닿은 아무곳에나 갔습니다. 어떨 때는 하루종일 걷기만 하고, 어떨 때는 기차를 타고 내리고 싶은 곳에 내려 걸으며 나에 대해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한 달 동안 여행을 하고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그리고 친구로부터 외국에 가서 봉사를 하는 것은 어떠냐는 제의를 받게 되었습니다. 기간은 세 달이었지만 저는 이 곳에 아무 미련이 없었기에 1년이라는 기간을 봉사 기간으로 정하고 떠났습니다.

주위의 많은 사람들은 걱정을 하며 한국을 떠나는 저를 만류했습니다.


“한번 더 공부하고 시험을 쳐야지. 지금 1년 동안 외국에 가면 다시 시험보기 어려울거야.”

“봉사는 합격하고 나서 가는게 어때?”

“한창 젊은 20대 후반에 이렇게 떠나는 건 시간 낭비이지 않을까?”


저마다 걱정해주는 한 마디씩을 건냈습니다. 그들의 말이 모두 이해는 되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맞이한 현실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시험에 합격해서 꼭 부모님 산소에 찾아가리라는 다짐을 했던 제 모습이 너무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그래, 딱 1년이야, 1년 동안 여기에 있었던 일 모두 다 잊고 정말 내가 원하고는 것,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기간이라고 생각하고 잘 하고 오자’


스스로에게 이런 다짐을 하며 1년간의 외출을 떠났습니다.


1년 동안의 외국 생활은 정말 빠르게 지나갔습니다. 밖에 외출을 하거나, 누군가와 만나거나, TV를 보거나 하는 등의 낭비되는 시간이 없었기에 오로지 저에 대해 생각만 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무얼하며 살아야 하는지 대해서도 많은 고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외국 생활이 정리되어갈 때 즈음에 제 미래의 모습의 윤곽을 만들어 갈 수 있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했을 때 즐거움을 느끼는 것.....그게 뭘까?’


그것은 바로 5년 간 계속 해서 도전했지만 실패를 맛보았던 가르치는 일이었습니다.


생각이 정리가 되자 한국에 돌아오는 발걸음과 머릿속이 너무 가벼웠습니다. 삶에 대한 목표가 다시금 정리가 되자 한국에서 계속되는 실패에 무기력하고 자신이 없었던 제가 도리어 힘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짜증나고 힘들기만 했던 수험생의 생활이 이제는 감사하면서, 즐겁기도 했습니다. 스스로 돈을 벌어야 했기에 기간제 교사를 하며 공부를 하는 생활이 이어졌습니다.


그렇게 시험을 치르고 발표날을 기다렸습니다. 발표가 나는 아침이 되자 너무 떨렸습니다. 1분이 1시간처럼 느껴지고 가슴은 쿵쾅쿵쾅 뛰었습니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발표하는 시간도 안됐는데 계속 클릭만 하고 있는 저의 모습을 발견하고 이건 아니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친한 친구와 산에 가기로 했습니다. 맑은 공기를 마시며 친구와 산을 오르니 복잡했던 머리와 가슴이 뻥 뚫린 기분이었습니다.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며 천천히 산을 오르다보니 합격자 발표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머리는 안정을 되찾았지만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같이 공부했던 스터디 동생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형꺼, 수험번호 보내줄테니까 너가 확인해서 알려주렴”

그리고 기다렸습니다. 기다리는 시간이 왜 이리 긴장되고 길게만 느껴지던가요. 잠시 뒤 전화가 왔습니다.


"형, 이름 있네. 합격 축하해요."

합. 격


이 두 글자. 너무나 듣고 싶었지만 오랜 기간 동안 들을 수 없었던 소리였기에 듣는 순간 계속해서 눈물만 나왔습니다. 눈물이 계속 흘러 동생과 더 말을 할 수가 없어서 얼른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 자리에 서서 한동안 울었습니다. 그렇게 울고 나니 옆에 있던 친구가 저에게 나지막히 말했습니다.


"상현아, 소주 1병 사가지고 이제 부모님 산소에 찾아가야지~"

6년 동안 가고 찾아 가고 싶었지만 너무 죄송해서 차마 갈 수 없었던 그 곳. 합격해서, 자랑스런 아들이 돼서 꼭 합격증을 들고 가리라 다짐했던 그 곳.

눈물이 다시 하염없이 흘러 나왔습니다.


‘내 인생은 왜 이럴까?’

세상에 대한 불만, 스스로에 대한 자책, 친구들을 보고 있노라면 드는 부러움,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 돌아가신 부모님에 대한 죄송스러움.

이런 것들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지난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합격" 이라는 두 글자로 인해 이젠 이런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참 눈물을 흘리고 나니 머릿속에 많은 과거의 기억들이 생각이 났습니다.


아빠,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울 던 모습, 삶이 힘들게만 느껴져서 무의미하게 보냈던 시간들, 하지만 그런 나에게 아침밥을 챙겨먹으라며 도시락을 건내 주셨던 선생님, 수학여행비가 없어서 고민하던 제게 대신 수학여행비를 내주고 친구들에게는 비밀이라고 하셨던 선생님, 하교 후 항상 집에 들려서 저녁 밥 먹고 가라며 손수 저녁을 챙겨주신 친구 어머니, 장학금을 받을 수 있게 추천해준 선생님, 혼자 있으면 외로울까 주말에 항상 저와 시간을 보냈던 친구들, 기숙사에 이불이며 물품들을 가져다 주신 이모들, 고등학교 졸업 후 한동안 갈 때가 없자 기꺼이 3개월간 친구방에서 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친구네 가족, 엄마 돌아가신 후 한 번도 챙기지 않았던 생일을 매년 챙겨준 친구들, 외국으로 갈 때 그 곳에서 쓰라며 얼마의 돈과 자신의 옷가지를 건내주던 친구, 공부하느라 힘들지 않냐며 내 손을 잡고 한의원을 찾아가 보약을 지어준 친구까지.


그동안 잊고 있었던 제 주위의 고마운 분들이 기억이 났습니다. 저 혼자인 세상살이가 녹록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런 분들이 있었기에 삶을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이런 분들의 도움이나 관심이 없었다면 과연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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