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이 현실이 되는 순간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행성]
군 생활 26개월 중 가장 빠르게 뛴 날이 있다.
당시 우리 부대는 GOP에서 철수하고, 민가에서 약 5km나 더 들어간 산속 부대로 이전했다.
가로등? 없다.
사람? 없다.
도로? 비포장.
해가 지면 앞이 보이지 않았고, 마치 세상에서 소외된 작은 행성 같았다. 그날도 나는 옆 산에서 근무하던 부대를 순찰하고 운전병과 함께 복귀하던 중이었다.
[라이트 불빛 사이로 지나간 그녀]
차 라이트가 유일한 빛이었고, 라디오는 끊겨 있었다. 정적 속에서 들리는 건 엔진 소리와 간헐적인 바퀴 소리뿐.
그때였다.
라이트 불빛 사이로 한 여자가 빠르게 지나갔다.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나는 얼어붙었다. 정신이 돌아오기까지 대략 10초.
“운전병... 멈춰봐.”
운전병이 급브레이크를 밟자,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 방금 봤냐?”
운전병은 눈이 동그래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발...]
“어... 야, 혹시... 발 봤냐?”
귀신은 발이 없다는 얘기를 어디서 들은 기억이 났다. 하지만 운전병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죄송합니다... 너무 놀라서 액셀만 계속 밟았습니다.”
그렇게 둘이 후레쉬를 들고 내려, 불빛을 주변에 비췄다. 어두운 숲, 뿌리만 보이는 나무들, 기척은 없고 바람도 불지 않는다.
그녀는 없었다.
[이승 탈출 러닝머신 가동]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내 막사는 운전병이 있는 막사에서 5분 거리였다.
먼저 운전병을 막사에 데려다 주었다.
평소 같으면 아무렇지 않게 걸었을 길인데, 이날은 오직 ‘그녀’의 얼굴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 눈빛... 그 하얀 얼굴... 그... 발은 있었을까, 없었을까?
결국 나는 뛴다. 달린다. 미친 듯이.
바람을 가르며. 이승 탈출 러닝머신 가동.
[상상의 힘]
막사 문을 열자마자 숨이 턱에 차올랐다. 그 상태 그대로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안 온다.
그녀의 얼굴이 자꾸 떠오른다. 눈 감으면 나타나고, 눈 떠도 기억난다.
그날 밤 나는 두 가지를 깨달았다.
첫째, 사람은 무서울 때 진짜 빨라진다.
둘째, 귀신이 무서운 게 아니라, 확신 없이 본 귀신이 제일 무섭다.
가장 무서운 건 확실하지 않은 것들이다.
상상이 현실보다 더 무섭고,
의문이 답보다 더 강력하다.
때로는 달리는 것도 용기다.
무엇이 무서운지 알고
거기서 벗어나려는 것도
하나의 생존 본능이니까.
[어른이 된 지금의 귀신들]
지금도 나는 이상하게 사람들의 발을 유심히 보는 습관이 있다.
그리고 깨달았다. 어른이 되어서도 우리 주변에는 발이 있는지 없는지 모를 것들이 너무 많다는 걸.
불확실한 미래들, 애매한 관계들, 확신할 수 없는 감정들. 모든 것들이 그날 밤의 '그녀' 같다.
보긴 봤는데, 확실하지 않고, 그래서 더 무섭다.
[상상력이라는 선물]
하지만 그날의 경험이 완전히 나쁘지만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상상력이라는 건 때로는 우리를 두렵게 하지만, 동시에 삶을 더 흥미롭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확실한 것만 있는 세상은 너무 재미없으니까.
미지의 것들이 있어야 인생이 모험이 된다.
[모든 어른들의 미지와의 만남]
누구나 인생에서 자신만의 ‘그녀’를 만난다.
확실하지 않지만 분명히 본 것 같은 것들,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무서운 것들. 그런 것들 앞에서 우리는 때로는 전력질주하기도 하고, 때로는 용기내어 다가가기도 한다.
중요한 건 그 두려움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배우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날 밤 배웠다. 불확실함도 삶의 일부라는 걸. 그리고 때로는 도망치는 것도 용기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