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망가진 구원 요청

Love119: 나는 너의 가장 완벽한 지옥

by 상현달

모든 것을 잃었다. 감정, 자부심, 과거, 그리고 세상과의 모든 연결고리. 하진은 이제 강도운이라는 태양 주위를 맴도는, 이름 없는 행성에 불과했다. 그녀의 하루는 그의 명령으로 시작되어 그의 감시 아래 끝났다. 그녀의 존재 이유는 오직 그의 ‘완벽한 작품’이 되는 것, 그것뿐인 것 같았다.

하지만 재가 되어버린 폐허 속에서도, 생명은 기어코 싹을 틔우는 법이다. 그녀의 내면 가장 깊은 곳, 그 누구도, 심지어 강도운조차 들여다볼 수 없는 영혼의 코어(Core)에서, 복수라는 이름의 작은 불씨는 꺼지지 않고 있었다. 살아남아야 한다. 이 모든 것을 되돌려 주기 전까지는, 결코 무너질 수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도움이 필요했다. 혼자서는 불가능했다. 이 완벽한 디지털 감옥을 파괴하기 위해서는, 감옥의 설계도를 아는 또 다른 조력자가 필요했다. 그녀의 머릿속에 한 사람의 이름이 떠올랐다.


‘윤지수.’


몇 년 전, 연구소에서 비슷한 사건의 피해자였다. 당시에는 다른 팀 소속이었고, 소문만 무성했을 뿐 정확한 내막은 알려지지 않았다. 가해자는 다른 연구소로 발령이 났고, 윤지수는 긴 휴직 끝에 복귀했지만 예전의 모습을 잃어버렸다는 이야기만 들었을 뿐이다. 그녀라면, 이 지옥을 이해해 줄지도 모른다. 그녀라면, 이 감옥의 약점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마지막 남은 동아줄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강도운은 그녀의 모든 통신을 실시간으로 감시하고 있었다. 이메일, 메신저, 심지어 은밀한 다크웹을 이용하더라도 그의 눈을 피할 수는 없을 터였다.

그때, 하진의 뇌리에 한 가지 가능성이 스쳤다.


완벽한 시스템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시스템에는 반드시 허점, 즉 버그가 존재한다. 강도운이 만든 이 완벽해 보이는 감시 시스템에도 분명 그런 것이 있을 터.


그녀는 며칠 밤낮으로, 그의 명령을 수행하는 척하며 시스템의 로그 파일을 분석했다. 그녀의 모든 행동은 기록되고 있었지만, 그 방대한 데이터 속에서 그녀가 진짜 ‘무엇을’ 보고 있는지를 그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찾아냈다.


아주 미세한 틈.


매일 새벽 3시 정각. 연구소의 메인 서버가 하루 동안 쌓인 방대한 양의 로그 파일을 백업 스토리지로 이전하는 순간.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과부하로 인해, 강도운의 감시 시스템 스트리밍에 0.7초의 딜레이(Delay)가 발생하는 것을 발견했다.


0.7초.


눈을 한번 깜박이는 것보다도 짧은 시간.

하지만 지금의 하진에게는, 지옥의 문을 열 수 있는 영원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그녀는 며칠에 걸쳐 계획을 세웠다. 윤지수에게 보낼 메시지를 미리 암호화하여 클립보드에 저장해 두었다. 그리고 운명의 그날 새벽 2시 59분,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컴퓨터 앞에 앉았다. 웹캠의 녹색 불빛이 어김없이 그녀를 비추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잠 못 들고 뒤척이는 모습을, 또 다른 형태의 ‘작품’으로 감상하고 있을 터였다.


2시 59분 59초.


그녀는 숨을 멈췄다.

새벽 3시 정각.


바로 그 순간, 그녀의 손가락이 기계와 같은 속도로 움직였다. 미리 준비해둔 보안 메일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암호화된 메시지를 붙여 넣고, 전송 버튼을 눌렀다. 이 모든 과정이, 정확히 0.68초 안에 이루어졌다.

메시지의 내용은 단 한 줄이었다.


살려줘.


다시 시스템은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침대로 돌아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지만, 얼굴에는 어떤 표정 변화도 드러내지 않았다.

이제 남은 것은 기다림뿐이었다.

하지만 응답은 윤지수가 아닌, 강도운에게서 돌아왔다.


다음 날 아침, 그녀의 책상 위에는 따뜻한 커피와 함께 메모지 하나가 놓여 있었다.


‘아아, 감동적인 우정이네. 하지만 그 사람, 아직도 자기 지옥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거 몰라요?’

하진의 세상이 무너져 내렸다. 그는 알고 있었다. 0.7초의 틈마저도 그의 계산 안에 있었던 것이다.


강도운은 그녀가 보는 앞에서, 그녀의 계정으로 윤지수에게 새로운 메시지를 보냈다. 그것은 윤지수의 가장 끔찍한 트라우마를 비웃고 조롱하는, 악마의 속삭임이었다.


[언니, 아직도 밤마다 그놈 꿈꿔? 난 이제 행복한데. 새로운 주인을 만났거든. 언니도 한번 만나볼래?]


얼마 지나지 않아, 윤지수에게서 답장이 돌아왔다. 그것은 구원의 손길이 아니었다. 배신감과 증오로 가득 찬, 처절한 절규와 저주였다.


하진은 자신의 손으로, 마지막 동아줄을 끊어버린 셈이었다. 구원을 요청하는 손길은, 도리어 또 다른 피해자를 지옥으로 끌어들이는 칼날이 되어 돌아왔다.


완벽한 절망.

더 이상 희망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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