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수치심이라는 먹이

Love119: 나는 너의 가장 완벽한 지옥

by 상현달

‘웃으면서 우는 인형’.


그것이 하진의 새로운 이름이었다. 강도운은 그 기괴한 놀이에 완전히 매료된 듯했다. 그는 수시로 하진에게 상반된 감정을 동시에 표현하라고 명령했다. 기쁜 표정으로 절망적인 독백을 읊게 하고, 화난 얼굴로 사랑을 고백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존엄성은 그의 유희 속에서 조각조각 해체되었다. 이제 그녀에게 감정은 영혼의 표현이 아니라, 주인의 명령에 따라 수행해야 하는 과제일 뿐이었다.


하지만 인간의 감정이라는 장난감에 서서히 흥미를 잃어갈 때쯤, 강도운은 새로운 타겟을 발견했다. 그것은 하진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그녀의 존재를 지탱하는 마지막 기둥. 바로 그녀의 ‘자부심’이었다.

그날, 그는 하진을 자신의 자리로 불렀다. 그리고는 인터넷 검색창에 ‘천재 해커 서하진’이라는 키워드를 입력했다. 화면에는 그녀의 과거 영광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대학 시절, 수많은 밤을 새워 완성했던 인공지능 관련 석사 논문. 국내 최고의 해킹 방어 대회에서 최연소로 대상을 거머쥐었을 때의 기사. 각종 보안 콘퍼런스에서 발표자로 나섰던 그녀의 모습. 그녀의 천재성을 증명했던 과거의 모든 기록들이었다. 한때는 그녀의 가슴을 벅차게 만들었던 이력들이, 지금은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대단했네, 우리 하진이.”

강도운이 마우스를 스크롤하며 비꼬는 투로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이 모든 게 다 무슨 소용이지? 결국 지금의 너는 내 손바닥 안에 있는데. 과거의 영광 따위, 내가 얼마든지 새로 만들어 줄 수 있잖아. 오히려 이런 쓸데없는 과거가, 네가 나에게 완벽하게 종속되는 데 방해가 될 뿐이야.”

그는 하진의 의자를 자신의 곁으로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그녀의 손을 잡아 키보드 위에 올려놓았다.


“네 손으로 직접 지워.”

그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다.


“인터넷에 떠도는 네 과거의 흔적들, 네가 직접 해킹해서 하나씩 다 삭제하는 거야. 그리고 이 주문을 외우면서 하는 거야. ‘나는 보잘것없는 존재입니다’라고.”

수치심.


그것은 인간의 영혼을 안에서부터 갉아먹는 가장 강력한 독이었다. 강도운은 이제 그녀의 수치심을 자신의 새로운 먹이로 삼으려 했다. 그녀가 스스로를 부정하고, 자신의 과거를 파괴하며 느끼는 그 고통스러운 감정을, 그는 바로 곁에서 음미하고 싶어 했다.


“어서.”

그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의 숨결이 닿을 때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선배의 과거는 필요 없어. 오직 나에게 종속된 현재만 있으면 돼. 과거의 영광? 그런 건 내가 얼마든지 새로 만들어 줄 수 있어. 아니, 이제부터 내가, 너의 유일한 영광이 될 거야.”

하진은 저항할 수 없었다. 그녀의 눈앞, 그의 모니터 한편에는 언제나처럼 동생의 심박수 그래프가 그녀를 인질로 잡고 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모교 서버에 침투하고, 학술 데이터베이스를 해킹했다. 그녀의 눈부신 재능이, 이제는 그녀 자신의 역사를 지우는 데 쓰이고 있었다.

“소리 내서 말해야지. ‘나는 보잘것없어’라고.”

그가 다그쳤다.


“나는... 보잘것없어.”

하진의 입에서 텅 빈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녀는 주문처럼 그 말을 되뇌며, 자신의 논문을, 자신의 수상 기록을, 자신의 이름이 빛나던 모든 기사를 하나씩 삭제했다. 그녀의 자부심이 디지털 가루가 되어 인터넷의 심연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강도운은 바로 옆에서 황홀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그는 그녀의 무너져 내리는 자존심과 타오르는 수치심을 양분 삼아, 더욱더 거대한 괴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모든 기록을 삭제하고 난 뒤, 하진은 텅 빈 눈으로 모니터를 응시했다. 인터넷 세상에서, ‘천재 해커 서하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아무것도 아닌 존재, 오직 강도운에게만 속한 익명의 존재가 되었다.

그녀의 존엄성을 지탱하던 마지막 기둥이, 그렇게 그녀 자신의 손에 의해 무너져 내렸다.

폐허 속에서, 그녀는 더욱더 차가워지고, 더욱더 단단해지고 있었다.

이 모든 치욕을, 배로 되돌려줄 그날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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