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키 17>을 봤다.

클라이언트는 알 리 없는 지독한 노동자의 세계

by 재서기

SF 배경에 블랙코미디를 범벅한, 극한직업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생존기. 우리나라에선 유독 힘을 못 쓰는 장르 조합이었고, 그 때문인지 세간의 평도 여러 가지로 갈린 작품이었지만 나는 아주 몰입해서 재미있게 봤다. 영화 속 미키가 영혼이 깃든 육체를 용광로에 처넣고 리프린팅 되는 걸 반복하듯, 영혼을 갈아 쓴 대본을 피드백을 받아 용광로에 처넣고 리프린팅 하는 걸 반복하는 일에 종사 중이라 그런 걸지도. (적어도 대본 수정은 죽음만큼 괴롭지는 않겠지... 만)


회의 때 대본도 안 읽고 오는 사람도 있답니다 (실화)


어쨌든, 예상했던 것만큼 초반은 불편했고 그 불편함만큼 후반은 즐거웠다. 영화를 다 보고 리뷰를 몇 개 살펴보니 작위적으로 과장된 캐릭터와 끼워 맞춰진 것 같은 결말을 못마땅해하는 의견들이 많더라. 그런데 현실에서도 그런 지독한 군상들이 보란 듯 날뛰고 있고 우리네 현실도 그에 맞춰 위태롭게 흔들흔들하는 마당에 상업영화에서 이 정도의 즐거움과 후련함은 전달해줘야 하지 않나 싶다. 애초에 블랙 '코미디'인데 그런 것까지 <기생충>을 따라가면 너무 다큐멘터리잖아.



수정이 길어지면 몇 고인지도 헷갈려하는 사람도 나옵니다 (이것도 실화)


사족 : 원작 제목은 <미키 7>이던데, 일곱 번 정도 리프린팅 했으면 프로젝트에 긍정적인 변화가 나타나야 하는 게 맞지 않나 싶다. 솔직히 <미키 17>은 너무 지독하단 말이지. 이건 일하는 사람 잘못이 아니라 일 시키는 사람의 잘못이 맞다. (클라이언트의 과도한 수정 요청은 작가의 번아웃을 부릅니다. - 경험자)


사족 2 : 자꾸 대본 작업과 겹쳐 보게 되는데, <미키 17> 속 상황은 16고가 좋다는 사람과 17고가 좋다는 의견이 반반으로 나뉘어 결론이 안 나는데, 정신 나간 사람 한 명이 '둘 다 장단점이 있으니까... 그거 장점만 합쳐서 어떻게 안 돼요?'하고 작가에게 '절충개선안'을 제시하는 끔찍한 상황이구나...


사족 3 : 리프린팅 때마다 추가 보수를 받는다는 계약 조항이 있었다면 미키의 삶은 조금 나아지지 않았을까.

뭐, 애초에 잘못된 계약인 걸 알면서도 그것밖에 답이 없어서 도장을 찍을 수밖에 없었단 게 문제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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