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썬더볼츠*>를 봤다
<썬더볼츠*>의 원제는 <THUNDERBOLTS*>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이루는 팀명을 그대로 옮겼다. 그런데 그 뒤에 붙은 별표(*, asterisk)까지 그대로 옮겨왔다. 이건 이 기호에 특별한 의도가 있다는 뜻이다.
영어권에서 별표 기호는 여러 가지 용도로 쓰인다.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건 검열 용도다. F**k이라든지, S**t이라든지. 대충 '삐~' 소리로 읽으면 되는 그런 거.
이 영화의 제목에서 쓰인 별표는 '가칭'이라는 뜻으로 쓰였다고 한다. '썬더볼츠'가 임시 명칭이라는 거다. 영화 안에서 이 지점은 충분히 설명되고, 이야기의 결말과도 이어지는 나름 중요한 요소로 정리된다.
그런데 별표는 스포츠 경기에서 '확실하지 않은 기록' 혹은 '인정하기 어려운 기록'이란 뜻으로도 쓰인다.
양궁 경기에서 과녁에 화살이 명중했는데 애매하게 맞아서 이게 9점인지 10점인지 바로 판명이 안 될 때,
야구에선 어떤 선수가 기록을 세웠는데 약을 한 전적이 있는 선수라 그걸 인정하기 어려울 때 등의 상황에 쓰이는데, 한마디로 '이걸 100% 인정하긴 어려움'이란 뜻이다.
메이저리그에서 행크 아론의 755개 홈런 기록을 깨뜨린 배리 본즈의 756번째 홈런볼을 손에 넣은 수집가가 그 공에 별표를 새겨 명예의 전당에 기부한 사례가 있다. 스테로이드를 복용하고 홈런을 날린 배리 본즈의 기록을 인정할 수 없다는 표현이었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서 이야기하자면, 이 별표는 작품이 처한 외적 상황과 캐릭터들이 작품 내에서 겪는 상황을 동시에 대변하는 재미있는 기호다. '창조주'들의 실책으로 삐끗해 버린 세계 속에서 아등바등하다 끝내 이 '별표'를 지워내는 '피조물'들의 이야기라서.
<썬더볼츠*>의 주인공들은 예전 마블이 찬란히 빛날 때, 주인공들의 그림자 뒤에 가려 있던 조연들과 빌런들이다. ‘하자가 있는 영웅과 악당에 가까운 반영웅 캐릭터들이 주인공으로서 모여 팀업을 이룬다’는, 한땐 신선했지만 여기저기서 많이 쓰여 이젠 식상해져 버린 콘셉트를 뒤늦게 채택해 시작한 이 영화는 <수어사이드 스쿼드> 같은 레퍼런스에 등장하는 빌런들이 그랬듯, 지들끼리 싸우고 도망치고 의심하는 개그로 이야기를 이어간다.
하지만 이 영화만의 차별점은 분명 존재한다. 그건 이 영화가 '어벤저스는 이제 없다'는, 작품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어마무시한 위기에 처한 자신들의 상황을 곱씹으며 푸념을 연발한다는 거다.
예전 <스파이더맨: 노웨이 홈>에서, 평행세계라는 소재를 절묘하게 풀어낸 것에 감탄하고 '앞으로 10년은 더 즐겁게 해 줄 수 있겠다'며 기대했지만 '산왕전을 마친 북산'처럼 마블은 그 이후 추락을 반복했다. 메인스트림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선 10부작 드라마를 억지로 봐야 하는, 떨이 강매 같은 마블의 새로운 페이즈 전략에 실망하고 한동안 마블 영화를 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썬더볼츠*> 안의 뉴욕과 그 안의 캐릭터들이 어떤 위기에 처해도 시큰둥하게 느껴졌다. '토니와 블위와 캡틴 없는 세계 따위 망하든 말든', 대충 이런 느낌이랄까.
대체로 나와 비슷한 심정으로 스크린 앞에 앉았을 관객들을 한껏 의식하며, 영화 속 캐릭터들은 열심히 구르고, 싸우고, 칭얼댄다. 그 전의 마블 작품들 속 신캐들이 했던 것처럼 명가의 후광을 업고 잔뜩 거들먹거리지도 않고, 어설픈 사상을 경솔하게 내뱉지도 않는다. 의도적으로 색감을 날려버린 삭막한 화면 속에서, <어벤저스>의 영광은 빛바랜 추억으로 남은, 폐가가 되어버린 스타크 타워 안에서 빌런에게 두들겨 맞으며 처절하게 서사를 끌어간다.
그러나 <썬더볼츠*>의 주인공들은 잔뜩 일그러진 상황 속에서 모래뭉치 같은 팀업을 아슬아슬하게 이어나가지만 그래도 ‘토니 없는 세상이지만 망하게 둘 순 없다'라고 항변하듯 영웅이 해야 할 일들을 끝내 해낸다. 전우주적 스케일 속 공간을 오가며 호화찬란한 일들을 이루었던 과거 마블 캐릭터들의 업적에 비하면 정말 보잘것없이 느껴지는 일들이지만, '힘없고 죄 없는 시민을 구하는 영웅'의 모습은 어찌 됐든 감동적이다.
여전히 마블 세계는 캐릭터의 서사 문제로, 배우들의 나이 문제로, 이따금 개런티 문제로 떠나버린 매력적인 영웅들의 빈자리를 극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여전히 세계 안을 지키고 선 윈터 솔저의 얼굴 위에 보이는 불어버린 나잇살과 주름살을 보고 있노라면, 영화의 부족한 점에 실망하고 조롱하기보다는 한때 한껏 사랑했던 이 세계에 다시 희망을 걸고 싶어진다.
김 빠진 개그를 선보이는 쿠키 1 이후 이어지는 쿠키 2는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려는 마블의 의도를 제대로 보여준다. 그래서 오랜만에 소위 ‘마블 뽕‘이 느껴졌다. 20년 전, ‘마블 영화‘란 개념이 생겨나기도 전에 스크린 위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던 '그들'을 떠올리면서. (근데 그들 역시 여러 번 삐끗했다는 게 함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