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리아> 시리즈 속 선택에 대하여
<빅토리아>라는 게임 시리즈가 있다. 근 20년 넘게 명맥을 유지하는 중인 국가 경영 전략 게임인데, 제목처럼 19세기 ~ 20세기 초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게임이다.
그 시대가 어떤 시대였나 하면, 인류사에 있어 ‘진보’와 그에 수반하는 ‘착취’의 정도가 극을 찍는 시대라 하겠다.
교과서에서 나오는 산업혁명 덕분에 산업 생산량이 무지막지하게 늘어나고, 그를 토대로 떼부자가 된 자본가들이 돈의 힘으로 또 다른 사업 분야를 열어가며 진보를 반복했던 시대,
그러나 그 반면에 공장의 부품이 되어버린 노동자들이 하루 20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하룻밤 방을 빌릴 돈도 없어 줄 하나를 매어놓고 거기에 빨랫감처럼 기대 잠을 청하던 시대.
더욱이 스스로 혁명을 이뤄내지 못한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들은 ‘미승인국’이라 낙인찍히고 식민지가 되어 자원과 노동력을 추출하는 수혈팩 취급받던 시대.
빅토리아 시대 특유의 '상위층 일부가 독점하는 번영'은 몇몇 역사덕후들이 애호해 마지않는 유럽의 ‘벨 에포크(아름다운 시대)’와 일본의 ‘다이쇼 로망‘으로 이어지고, 그다음에 끔찍한 세계대전을 치르고 나서야 그 일련의 흐름이 끝나게 된다.
그다음은 뭐, 이 시대의 반향으로 일어난 마르크스-레닌의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강렬하게 충돌한 이후 냉전… 뭐 이렇게 이어지고.
사실 우리나라는 이 빅토리아 시대~냉전 시대에 이르기까지 자행된 국가 간 폭력에 있어 철저하게 피해자로 위치한 나라다. 불평등조약, 식민지화, 해방 후 이념 충돌, 내전 후 분단에 이르기까지.
그래서 이 끔찍한 역사의 시발점이 되는, 조선이 세도정치에 시달리고 있던 그 시대로 돌아가 모든 것을 바꾸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 우리나라의 플레이어들은 이 게임을 할 때 ‘조선’을 선택하기 일쑤다.
그리고 곧 깨닫게 된다. 그 시대를 살던 그 양반들에겐, 그 끔찍하고 잔인한 착취와 차별이 당연한 일이었다는 걸.
<빅토리아 3>는 다른 전략 게임들과는 다르게, 전쟁으로 땅을 따먹거나 다른 나라를 굴복시키는 게 주 콘텐츠가 아니다.
게임의 주 목표는 ‘국가 총생산량’을 늘리는 것이며, 플레이어가 게임 속에서 하는 행위 대부분이 이 총생산량을 늘리는 데에 집중되어 있다.
각 나라엔 이 총생산량을 비롯한 국력으로 책정된 국가순위가 매겨지며, 여기서 1등을 하는 것이 (물론 목표가 딱 정해진 게임은 아니지만) 대체로 최종 목표다.
게임을 시작하고 ‘조선’을 고른 플레이어는, 청의 종속국이자, 미승인(서구로부터 야만인 취급 당하는) 국가이자, 세도 정치 세력에 의해 손발이 묶인 나라를 접하게 된다.
이를 어떻게 극복하고, 옆 나라 일본 놈들이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키고 제국주의 국가를 형성하기 전에 서구화를 완성하고 역관광을 시킬 것인가?
답은 정해져 있다. 노동자를 갈아서 산업을 융성시키고, 아직 깃발이 안 꽂힌 땅에 식민지 깃발을 꽂아 자원을 수탈하는 거다.
물론 게임이니까 계급제를 혁파하고 노동자와 서민을 주 정치 지지층으로 삼아 나라를 이끌어가는 것도 가능은 하지만 그렇게 되면 게임 난이도가 급상승한다는 함정이 기다리고 있다.
그들이 지지하는 정책이 공장 짓지 마, 식민지 만들지 마, 교육-보건 정책 그게 뭔가요? 등의 시대를 역행하는 - 게임 점수 못 따게 하는 - 것들 뿐이라서.
<빅토리아 3>의 백미는 ‘선택’이다. 게임 속에서 랜덤 혹은 역사적 상황에 맞춰 제공되는 수많은 선택지가 플레이어의 결정을 기다리고, 플레이어는 ‘결단’을 해야 한다.
이 결정에 따라서 국가 전반의 흐름이 달라진다. 법률이 폐기되느냐 통과되느냐, 산업이 위험을 감수하고 빠르게 발전하느냐 안전하고 더디게 발전하느냐.
수없이 날아드는 선택지를 관성적으로 클릭하다가, 수도 없이 반복되는 공장 사고 이벤트에서 ‘진보를 위한 당연한 희생’이란 선택지를 클릭하는 나를 발견했다.
그 이벤트는 공장 기계 때문에 사망한 노동자의 사건을 다룬 기사와 이에 따른 규제를 바라는 노동자와 넘어가길 바라는 사업가의 의견을 제시하고 있었다.
현실에서든 게임에서는 노동자는 힘이 없다. ‘국익’을 위해서 ‘희생‘하는 건 언제나 힘없는 계층이다.
작업을 할 때 애용하는 카페가 있다. 오래 자리를 차지해도 민폐가 아닐 만큼 넓은 장소에 콘센트도 충분하고, 사장님도 친절한 그런 가게다.
커피를 시켜 마시며 작업에 열중하다 보면, 커피값으로 퉁치기 미안할 만큼 오래 카페에 머물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가게에서 파는 케이크나 빵을 시켜 끼니를 해결한다. 그런데 며칠 전 그 빵들을 만드는 공장에서 벌어진 사고를 접했다. 재발 방지를 천명했는데도 계속 반복된 사고와 죽음이었다.
아마 친절한 사장님은 내가 마음속으로 ‘불매’를 운운하며 며칠 자기 가게에 발을 끊었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그리고 독하지 못하고, 끝내 이기적인 나는 양심의 가책을 조금 덜어낸 후에 다시 가장 작업이 잘 되는 그 카페로 향하겠지.
… 수백 년 후에 이 시대를 다루는 게임이 나온다면, 그들은 어떤 선택지를 제시받고 고민할지, 내심 궁금해지는 하루다.
사족: 게임처럼 모든 것을 수치-목적화해 제시받는 위치에 선 사람에겐, 숫자 뒤에 가려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삶을 떠올리는 감수성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정치글 안 되는데)
사족 2: 게임 속 기술적 진보에 따라야 할 사회적 진보가 자리 잡는데 100년이 넘게 걸렸다. 지금 시대의 기술적 진보에 뒤따르는 사회적 진보는 언제쯤, 어떤 형태로 이루어질까.